4월 30일 밤늦게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1000억 원대의 선물투자 손실과 투자금 출처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개인적인 투자였다”는 짧은 답변만 내놓은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검찰은 일단 공금 횡령 등 불법 행위는 없는 것으로 보지만, SK그룹은 2004년에도 회사 돈 수천억 원으로 선물투자를 한 혐의로 손길승 회장이 구속된 전례가 있는 만큼 자금 성격과 관련한 의혹은 여전하다. 설령 합법적인 자금으로 투자했다고 해도 재계 순위 3위의 대기업 총수가 왜 투기 성향이 큰 선물에 투자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대기업 총수가 돈 몇 푼 벌려고 투자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SK그룹에서도 인정하는 바다. SK그룹 관계자는 “대기업 총수가 개인 용도로 투자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여러 상황을 고려해 이뤄진 투자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순환출자와 SK증권 처리 탓?
증권가에선 최 회장의 선물투자를 SK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최 회장이 선물투자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2009년과 2010년 당시의 SK그룹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2010년 9월 SK C·C 주식을 담보로 2000억 원의 대출을 받았다. 당시 최 회장은 SK C·C(지분율 44.5%)를 통해 SK그룹 전체를 지배했다. 구체적으로 SK C·C → SK(주) → SK텔레콤 → SK C·C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따라서 지주회사 체제를 완성하려면 SK텔레콤이 가진 SK C·C 지분 9%를 처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버린의 SK 경영권 장악 시도 같은 우환을 없애려면 대주주가 직접 관련 지분을 사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2010년 초 5만 원 안팎이던 SK C·C 주가가 상승세를 이어가며 9월에는 9만 원까지 치솟아 지분 매입 자금이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당시 최 회장이 SK C·C 지분을 사들이려면 4000억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SK C·C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 위험성은 높지만 단기간에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선물투자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이후 SK텔레콤은 2010년 10월 자사가 보유한 SK C·C 지분 9% 가운데 4.9%를 쿠웨이트 투자청에 매각하고, 2011년 2월에는 KB금융그룹과 2000억 원 규모의 지분을 맞교환하면서 순환출자 구조를 없앴지만,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SK증권 문제는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일반 지주회사는 은행, 증권 같은 금융 자회사를 둘 수 없다. 2007년 7월 지주회사로 전환한 SK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분 정리 유예기간을 둔 덕에 SK증권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유예기간이 2011년 7월 만료되므로 그 전에 SK증권 지분을 전량 매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백 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2월 초 최 회장이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정진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만났다는 주장이 야권에서 제기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개정안 = SK 특혜’라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4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았다. 재계에선 최 회장이 정치권을 통한 해결과 더불어 플랜B로 여러 시나리오를 고려해놓았으리라는 분석이 나온다. 즉, 건설사와 함께 그룹의 캐시플로로 평가받는 증권사를 순순히 매각하지 않을 것이며, 최 회장이 대주주로서 SK증권 지분을 사는 방안도 검토했으리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역시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SK그룹의 SK증권 지분은 2010년 9월 현재 SK네트웍스가 22.7%, SKC 7.7% 등 총 30.4%다. SK증권의 5월 3일 현재 주가가 2200원임을 고려할 때, 이를 매입하려면 210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결국 지주회사 체제의 완성과 SK증권 매각까지 고려한 큰 틀에서 실탄을 확보하려고 선물투자에 나섰다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최태원 회장의 1000억 원대 선물투자 손실 이유를 두고 경영권 강화 등 각종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2005년 SK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의 재선임안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버린자산운용의 데이비드 매플백 최고운영책임자(▶)와 SK그룹 최종건 전 회장의 아들인 SKC 최신원 회장(▶▶).
재계 일각에선 경영권 강화와 최 회장의 선물투자를 연결 짓기도 한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호가 출발할 때부터 SK그룹은 다른 재벌에 비해 지배구조가 취약했고, 2004년 소버린 사태를 겪으면서 지배구조가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실제 최 회장은 1998년 최종현 회장이 타계한 뒤 SK(주)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당시 최 회장이 보유한 SK(주) 지분은 0.07%였으며, 선친에게 유산으로 받은 지분을 합쳐도 0.13% 안팎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 2004년 3월 12일 주주총회에서 소버린이 최 회장의 경영권을 빼앗겠다고 나섰고, 표 대결을 펼친 끝에 SK와 소버린이 각각 6대 4의 지지를 얻었다. 최 회장은 경영권을 지킬 수 있었지만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투명경영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겠다”는 소버린 측의 주장에 많은 주주가 공감한 데 대해 최 회장과 SK 측은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그룹 내에 잠재적인 경쟁자가 있다 보니 지배권 강화 차원에서 실탄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다. 최종건, 최종현 두 형제가 일으켜 세운 SK그룹은 최종건 회장이 별세한 후 1973년부터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 최종현이 이끌었다. 이후 최태원 회장이 그룹을 이어받았다. 고(故) 최종건 회장의 아들은 SKC 최신원 회장이다.
이런 역학관계를 고려해 최태원 회장과 최신원 회장의 갈등설, 경영권 분쟁설, 그룹 분리설이 심심치 않게 거론됐다. SK그룹 내부에서도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촌(최신원 회장)과 그룹 분리를 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우세하다. 특히 최신원 회장이 3월 SK네트웍스 주주총회장에서 “SK 창업정신이 흐려지고 있다”며 강도 높은 비판을 내놓아 이 주장이 힘을 얻었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이 개인 투자를 한 구체적인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투자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다른 재벌처럼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비상장 주식을 이용해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로 자금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배당금, 주식담보 대출 같은 순수한 개인자금으로 합법적인 투자를 했다”고 강조했다.
이 일과 관련해 최 회장이 입을 닫으면서 공은 검찰과 금융당국으로 넘어갔다. 국세청은 최 회장이 전·현직 SK 임원의 계좌를 빌려 선물거래를 한 것이 금융실명제 위반이라 보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재벌 총수의 거액 투자 배경을 둘러싼 여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