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가 할복의 명을 받는 장면(좌). 할복을 위한 세리머니.
수치심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인들의 경우 윤리적 구성이 서구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유일신교를 가진 서구인들이 신 앞에 혼자 서서 ‘죄책감’을 느끼는 문화라면, 다신교를 가진 일본인들은 동료들 속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문화라는 것이다. 현상에 대한 진단은 옳다. 하지만 그 원인을 종교의 차이로만 돌리는 것은 불충분하다. 나머지 반쪽의 원인은 아마도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구의 중세는 기독교 문화였으나, 중세의 기사문화는 ‘명예심’을 강조했다. ‘명예심’을 뒤집으면 바로 ‘수치심’이 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전사들에게 ‘죄책감’이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은 결투와 전쟁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로맨스’라는 기사문학의 이상으로 미화했다. 여기서 목숨을 버려서라도 막아야 할 것은 바로 전사로서 스타일이 구겨지는 것.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독자로 신 앞에 서서 죄책감을 느끼는 문화는 근대의 ‘자율적 주체’의 형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율’이란 결국 바깥에 존재하던 감시의 시선을 자기의 내면에 들여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슈퍼에고를 내면화한 주체는 누가 보지 않아도 이른바 ‘양심의 가책’이란 것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죄책감의 문화는 유일신교에 문자문화의 산물인 내면화가 겹쳐질 때 성립하는 ‘반성(reflexion)’의 문화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반성이냐 자학이냐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을 당혹스럽게 한 것 중 하나는 일본군이 도대체 항복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이른바 ‘옥쇄’를 택했다. 전장에서 포로로 잡히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연합군 병사들은 포로로 잡힌 데 대해 그다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군의 눈에는 거꾸로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너절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할복한 시체를 염하는 장면(좌).할복한 시체를 관 속에 넣는 장면.
일본의 역사왜곡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 자신들이 했던 일이 드러나는 데서 ‘수치심’을 느낄 뿐이다. 과거에 수치심을 느끼는 자들은 치부를 덮어 미화하려 하고, 과거에 죄책감을 느끼는 자들은 치부를 드러내서 반성하려 한다. 일본의 과거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일본의 과거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의 목소리를 ‘자학사관’이라 부르곤 한다.
윤리냐 미학이냐
일본과 한국은 물론 다르다. 한국의 선비문화에는 제왕조차도 거기에 복종해야 하는 ‘도(道)’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서구에서 ‘신(神)’이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반면 일본의 무사문화에서 정의는 전쟁의 승패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문화는 주체의 형성을 윤리가 아니라 미학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서구 중세의 기사문화가 잔혹한 현실을 기사문학의 낭만으로 덮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수치심의 문화는 한국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근대의 반성적 주체 형성이 미흡한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학사관’이라는 말은 일본 우익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의 우익들 역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히 ‘자학’이라 부르기를 즐긴다. 예를 들어 제 역사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 가령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비판하고 거기서 저지른 만행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에서도 터부로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반성이 아니라 수치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모 전자 사장이 대통령의 형에게 뇌물을 주려다 발각됐다. 대통령이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촌로를 찾아가 뭐 하는 짓이냐”고 한마디 하자 그는 한강으로 차를 몰고 가 투신해버렸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뇌물을 주려 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 스타일이 구겨진 데서 오는 수치심이다. 죄책감은 죄를 짓는 순간 발생하나, 수치심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할복한 시체를 화장하는 장면.
일본 문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아리가토’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종종 ‘스미마셍’이라고 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의 극단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예의 바른 일본인들이 “혼자서는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못 건너도 집단으로는 건넌다”고 자조한다. 혼자서 옷을 벗는 것은 창피해도 목욕탕에서 집단으로 벗는 것은 창피하지 않은 법. 이는 법규를 지키는 문화조차 수치심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이를 “연대책임은 무책임”이라 표현한다. 이는 똑같은 현상에 대한 군사주의적 표현이다. 신의 눈길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안겨주고, 인간들의 눈길은 사람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주체 형성이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자기반성의 능력을 갖춘 ‘개인’의 형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원’의 형성으로, 때로는 연대로만 책임을 지는 ‘대원’의 형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문화는 남의 시선에 민감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거리 청소를 하던 시민들이 왜 2006년 독일월드컵 때는 거리를 쓰레기더미로 만들었던가? 대답은 간단하다. 2002년에 한국은 주최국으로 세계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반면 2006년에는 세계의 시선이 독일에 쏠려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공중도덕조차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위해 지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치심의 문화는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윤리적 형성의 원리로 삼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거시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매우 궁금해한다. 그들이 자국 문화에 대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처음으로 자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는 반드시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고, 그의 입에서 결국 텅 빈 칭찬이라도 얻어내고 만다.
남 보기에
1969년 도쿄 이치가야의 자위대 본부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할복자살한 전후 일본 군국주의 문인 미시마 유키오.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에게서 늘 들었던 것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하든 올바로 사는 것, 혹은 누가 뭐라 하든 내 멋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이른바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혹은 “여봐란듯이” 사는 것이 된다.
이런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 신 앞에 떳떳하지 않은 이도 사람들 앞에선 떳떳하고, 신 앞에 떳떳한 이도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 신고율이 낮은 것은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렇게 윤리의 형성이 타인의 눈에 맞춰진 사회에서는 죄도 드러나지 않는 한 떳떳하고, 죄가 아닌 것도 눈에 드러나는 한 부끄러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