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카페 ‘먹고 갈래 지고 갈래’에서 노인들이 ‘위하여’를 하고 있다.
‘먹고 갈래 지고 갈래’
이 카페는 젊은이들의 눈엔 독특하게 보이는 공간이다. 맥주를 마시러 들어왔다가 ‘놀라’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도 많다. 이 카페는 노인들의 놀이터이자 사랑방이다. ‘서비스업’ 경력만 40년이라는 임동수(62) 씨가 3년 전 ‘젊은이들에게 치여 술 마실 곳도 딱히 없는’ 노인들을 위해 이곳에 가게를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이 지긋한 노인들로 가득한 것을 보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기서 무슨 잔치하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러고는 도로 나가죠. 요즘 어딜 가나 노인들이 대접을 못 받고 쫓겨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반대죠. 노인들 세상이에요.”
1960년대 가요를 라이브로 듣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는 박응석(73) 씨는 “젊은이들 모이는 곳에 가면 노인들이 환영을 못 받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전국에서 거의 유일한 ‘노인 맞춤형 라이브 카페’다. 입구에 걸려 있는 ‘웃어른을 공경하자’라는 액자 속 문구를 가리키면서 박씨는 “노인을 환영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 들어왔다 “무슨 잔치하나요”
“탑골공원에 있는 노인들에 비하면 여기 오는 이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고요. 돈이 많은 사람들은 호텔 같은 곳에 가겠죠. 참,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 씨도 이곳에 자주 와요. 그 양반 오면 밥도 사고 술도 사고, 돈 많이 쓰고 가죠.”
색소폰 연주는 이 카페의 백미다.
금기동(59) 씨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으면 호텔처럼 좋은 곳을 가겠지만, 우리 같은 중간층은 갈 만한 데가 없다”고 지적한다. ‘젊은 사람들의, 젊은 사람들에 의한, 젊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만 있기 때문이다. 실버세대는 은퇴하기 전에 누렸던 ‘유흥’을 제대로 즐길 공간조차 갖지 못한 셈이다.
“얼마 전, 친구 두 명과 함께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서 강남의 성인 나이트클럽에 갔어요. 주책이라고 여길지 몰라도 젊게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죠. 그런데 나이트클럽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거절당했어요.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세상이 이제 나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금기동 씨)
‘아름다운 60대’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김경자(63·여) 씨가 “입구에서 거절당한 것은 그나마 낫다”며 말을 이었다. 김씨는 얼마 전 카페 회원들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나이트클럽을 찾았다고 한다. 일행은 소싯적을 떠올리며 신나게 춤을 추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무대를 향해 물을 뿌렸다고 한다.
10년 전 교직에서 은퇴한 K(69)씨는 학교 후배의 소개로 이 카페를 알았다고 한다. 처음엔 색소폰 연주를 한다기에 그것을 들으러 왔는데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어 단골이 됐다고. K씨는 휴대전화를 보여주면서 “핸드폰에 200명 넘게 전화번호가 입력돼 있는데, 대부분이 이곳에서 만난 친구”라며 소리내어 웃었다.
“우리나라는 노인들이 갈 데가 없어요. 기껏해야 공원이나 고궁 같은 곳에 가는 게 전부죠. 그러니 이런 곳이 있어 얼마나 감사해요? 음악도 듣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이곳에서는 누구나 쉽게 어울리고 친구가 된다. 신세대 며느리 험담 같은 소소한 얘기부터 국민연금, 조갑제류의 시국관 같은 굵직한 이슈까지 노인들의 대화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황혼의 로맨스’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다. K씨와 함께 술을 들이켜던 J(65)씨는 이곳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몸이 늙었다고 감정까지 늙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할 줄 안다고요.”(웃음)
J씨에 따르면 이곳은 ‘실버들의 사교클럽’이기도 하다. 인터뷰 도중에도 이따금 ‘부킹’이 진행됐다.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들만 있는 테이블에 가서는 “남자 셋이 왔다”면서 합석을 제안한 것이다. 이들의 ‘연애’는 20대 젊은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득 ‘젊은 사람들이 노인의 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경자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테이블 옮겨다니며 부킹도 자연스럽게
“자식들은 부모들에겐 성생활도 없는 줄 알죠. 그러니까 집에 엄마만 와서 손자를 봐달라고 하죠. 남편이랑 함께 가면 방을 따로 쓰게 해요. 아버지는 손자 방에, 엄마는 손녀 방에 밀어넣는 거죠. 저희 부부는 방을 따로 쓰게 하면 자식들 집에 절대 안 가요. 우리도 성생활이 있으니까요.”(웃음)
한 할머니는 “자식들은 으레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맡아주는 거라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자식들 욕심이죠. 평생 저희들 키우느라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제 자식들까지 키우라니 괘씸하죠. 모임에 못 나오는 친구들 보면 열이면 아홉은 손자 돌보느라고 그래요. 안타깝죠. 애기 봐주는 친구들 보면 관절염이다 뭐다 해서 아프기도 많이 아프고, 그래서 더 늙어 보여요. 나와서 놀아야 덜 늙는데 말이죠.”
노인들은 손자를 돌보고 싶지 않아도 안 봐줄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손자가 예쁜 데다 부모로서 자식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후가 걱정돼 자식들의 말을 들어주는 측면도 있다. 언젠가 자식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날이 올 텐데, 그때 꼬투리 잡힐 일을 만들어놓기 싫다는 것. 한 할머니가 ‘손자 못 맡기게 하는 법’이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딸 앞에서는 애를 세 번 떨어뜨려요. 단, 이불이나 쿠션처럼 안전한 곳에 떨어뜨려야 하죠. 그러고는 ‘내가 기운이 없다’며 엄살을 떠는 거예요. 며느리 앞에서는 내가 먹던 것을 애한테 주거나 걸레로 코를 닦아주면 돼요. 그러면 제 자식 귀한 줄 아니까 절대 안 맡겨요.”(웃음)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 뒤로 왠지 모를 서글픔이 엿보였다. 그동안 힘들게 살아왔고, 이제 나머지 인생은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바람이 과연 이기적인 것일까. 한 할아버지는 “부모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자식들이 잘 알 수 있게끔 기사를 쓰라”고 당부했다.
‘먹고 갈래 지고 갈래’에서 만난 노인들은 하나같이 “연말연시에 종로를 걷다 보면, 절로 마음이 울적해진다”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젊은이들이 흥겹게 놀고 있는데, 또 다른 한쪽에서는 또래 노인들이 따뜻한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뒤로하고 ‘먹고 갈래 지고 갈래’를 나왔다. 종로의 밤은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