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1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현 정치상황에 대한 소회(所懷)를 원색적인 단어를 사용해 드러냄으로써 대다수 국민을 당혹케 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았지만, 거친 표현방식은 내용이 갖는 진실성을 압도했고 연설의 가치와 진정성을 크게 실추했다. 특히 공중파 TV방송에 비춰진 그의 동작은 표현의 저급성을 극대화했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한창 자라는 세대에게 귀감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 시점에서는 구차하고 왜소한 외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이를 보고 뭘 느낄까, 외국 언론에서는 이를 어떻게 다룰까라는 생각을 하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항간에는 온갖 듣기 민망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으며, 그 원인 제공자가 대통령 자신이라는 데 더 큰 슬픔이 있다.
취임 직후 검사들과 가진 공개토론회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국민으로서는 이제 똑같은 그 질문을 대통령에게 던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구사하는 단어는 정제되고 논리 정연하며 두고두고 가슴 깊이 되새겨볼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뜻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물론 대통령에게도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감정이 있고 시민과 마찬가지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공인(公人)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양식과 방식은 따로 있다. 즉 가까운 친구, 친지와의 사적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공식적인 회합에서 권위와 위엄과 무게를 가지고 구사해야 할 단어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거친 단어는 스스로의 권위를 파괴하고 만다.
권위가 무너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경험과 경륜은 더 이상 존경받지 못한 채 오히려 과거지향적, 개혁저항적이라고 매도당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대통령의 단어는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탈권위적이고 탈형식적인 언행을 기층 민중에 다가가는 시대정신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자리잡았다. 물론 격식을 깨는 것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바람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고운 눈’과 ‘선한 마음’ 가져야 큰 정치 실현
사실 특정 단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속에 잠재된 특정 계층에 대한 증오심이다. 하지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단순 양분할 때, 대통령은 이 분류 틀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가졌다. 대통령은 결코 ‘굴러온 돌’이 아니며,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이미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모든 국민을 ‘고운’ 눈으로 봐야 한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고 국가발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운 눈과 선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원한다.
큰 정치를 한다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를 조율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때로는 정적과도 타협하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내주기도 해야 한다. 정치는 전승전패의 게임이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도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쓰다듬고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야당을 탓하기 전에 필요하다면 정책연대를 해야 하고, 언론을 탓하기에 앞서 그 비판의 핵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다음에는 같은 비판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 간에도 얼마든지 다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굳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해 적과 동지로 삼으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국민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정치를 접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한창 자라는 세대에게 귀감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 시점에서는 구차하고 왜소한 외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청소년들이 이를 보고 뭘 느낄까, 외국 언론에서는 이를 어떻게 다룰까라는 생각을 하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항간에는 온갖 듣기 민망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으며, 그 원인 제공자가 대통령 자신이라는 데 더 큰 슬픔이 있다.
취임 직후 검사들과 가진 공개토론회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국민으로서는 이제 똑같은 그 질문을 대통령에게 던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구사하는 단어는 정제되고 논리 정연하며 두고두고 가슴 깊이 되새겨볼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뜻을 담고 있어야 한다. 물론 대통령에게도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감정이 있고 시민과 마찬가지로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느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공인(公人)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양식과 방식은 따로 있다. 즉 가까운 친구, 친지와의 사적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공식적인 회합에서 권위와 위엄과 무게를 가지고 구사해야 할 단어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거친 단어는 스스로의 권위를 파괴하고 만다.
권위가 무너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경험과 경륜은 더 이상 존경받지 못한 채 오히려 과거지향적, 개혁저항적이라고 매도당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대통령의 단어는 기름을 붓고 있는 형국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탈권위적이고 탈형식적인 언행을 기층 민중에 다가가는 시대정신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자리잡았다. 물론 격식을 깨는 것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바람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고운 눈’과 ‘선한 마음’ 가져야 큰 정치 실현
사실 특정 단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속에 잠재된 특정 계층에 대한 증오심이다. 하지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단순 양분할 때, 대통령은 이 분류 틀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을 가졌다. 대통령은 결코 ‘굴러온 돌’이 아니며,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이미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모든 국민을 ‘고운’ 눈으로 봐야 한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을 적대시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고 국가발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운 눈과 선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를 원한다.
큰 정치를 한다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를 조율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며, 때로는 정적과도 타협하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내주기도 해야 한다. 정치는 전승전패의 게임이 아니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도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쓰다듬고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야당을 탓하기 전에 필요하다면 정책연대를 해야 하고, 언론을 탓하기에 앞서 그 비판의 핵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다음에는 같은 비판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 간에도 얼마든지 다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굳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해 적과 동지로 삼으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국민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정치를 접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