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26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학습효과로 무장한 노 대통령과 참모들은 이런 말로를 피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마련했다는 후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논리다. 물론 원칙과 명분을 선점해야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권력의 법칙도 동반한다. 우리당 친노 계열의 한 의원은 “청와대가 과거처럼 소극적인 레임덕 방지책으로 임기말을 맞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한 압박을 바탕으로 한 ‘도전과 응전’의 원리가 작동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 같은 레임덕 방지책은 정계개편 등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도 유용해보인다.
이 의원은 ‘도전과 응전’이란 레임덕 방지책의 첫 번째 희생양으로 고건 전 총리를 지목했다. 지난해 12월21일 ‘고 전 총리는 실패한 인사’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현직 대통령과 전직 총리의 대립과 갈등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노 대통령이 먼저 ‘공세’에 나선 듯하다.
전임들 보면서 오래전부터 준비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른 흐름이 잡힌다. 이 싸움은 고 전 총리가 시작했다는 게 청와대와 여권, 특히 친노 측 인사들의 설명이다. 대권 장정에 나선 고 전 총리가 갈수록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 왔다는 것. 이를 놓고 청와대 측은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고 전 총리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임기말에 접어드는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는 후문이다. 자신을 초대 총리로 발탁했던 대통령을 사실상 밟고 가려는 것으로, ‘분하다’는 표현이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당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참여정부와 노 대통령을 평가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고 전 총리는 항상 ‘초대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평가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이는 결국 참여정부와 노 대통령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도 지지도가 떨어진 최근에는 직설적 비판으로 바뀌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 대결이었다.”
결국 차별화를 준비해오던 고 전 총리가 지난해 12월21일 노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공세에 나섰다는 것.
그러나 고 전 총리 측이 청와대 측의 ‘준비’를 지나치게 가볍게 본 것이 불찰이었다. 고 전 총리의 한 참모는 “(노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당했다”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지난해 12월28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이 악수를 나누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레임덕은 차기를 도모하는 대선주자들의 차별화 전략에 의해 가속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YS를 흔들었고, 2002년에는 이인제 후보가 DJ를 공격했다.
노 대통령 측도 이런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 그래서 김근태 당 의장이나 정동영 전 의장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대통령을 동네북처럼 두드리는’ 정치인 그룹에는 고 전 총리뿐 아니라 두 인사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 대통령과 한 번씩 갈등을 겪었고 앞으로도 대립이 불가피하다.
노 대통령은 이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2006년 12월21일 ‘경고’를 보냈다. “링컨 대통령처럼 그들을 포용했지만 결국 욕을 먹었다”며 실패한 인사임을 시사한 것. 노 대통령을 배제한 채 독자노선을 걸으려는 데 대한 점잖은 충고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논리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행동이었다.
이 경고 직후 두 인사는 공동으로 활로를 찾아나섰고, 결국 지난해 12월28일 통합신당 창당에 합의했다. ‘실용과 개혁’으로 나뉘어 수시로 충돌해온 숙명의 라이벌이 다급한 처지에 몰린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의 공세가 그만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설정한 창당 로드맵은 노 대통령이 가고자 하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두 사람이 만든 합의문에는 노 대통령의 개입을 차단하는 안전장치도 숨어 있다. 결국 이제 서로가 서로를 ‘밟고’ 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청와대 측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투다. 여권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고 전 총리와의 공방전을 통해 노 대통령은 역시 싸움에 능하다는 게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노 대통령은 상대가 공격해오면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간다. 인파이터로 변신, 줄기차게 공격하는 기술이 탁월하다. 정계개편을 둘러싼 김 의장, 정 전 의장 등과의 주도권 경쟁에서도 노 대통령의 이런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노 대통령은 김 의장과 정 전 의장이 어떤 방법으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눈치다. 김 의장과 정 전 의장도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란 점을 잘 알 것이다.”
청와대 측은 대선주자들에 대한 강한 압박술로 레임덕은 물론, 정계개편의 주도권도 쥘 수 있다고 본다. 수성과 공격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다. 여권 주변에서는 내년에 처리될 대형 정책 이슈들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3월까지 한미 FTA 협상 문제를 처리해야 하고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도 매듭지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노 대통령 지지세력의 결집이 가능하다고 본다.
지지세력 결집 강한 청와대 지향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이 적지 않지만, 남북정상회담도 노 대통령이 꺼낼 수 있는 카드다. 이미 언급했던 임기 단축 문제도 메가톤급 이슈로서 노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노 대통령은 이런 이슈들을 대선을 앞두고 정치 세력을 재편할 때 최대한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박기영 전 청와대 과학보좌관을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에게는 이미 오래전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장직을 맡겼다. 회전문 인사란 비판에도 노 대통령이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것은 임기말 ‘강한 청와대’를 구축해 레임덕 방지는 물론, 정국 주도권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강한 압박이 현실정치에서 통할지는 미지수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 대통령의 정국 주도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지율은 하락하고 구심력보다 이탈하려는 원심력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지나 하산길에 접어든 지금, 시간도 노 대통령의 편이 아니다. 잘못하면 내부의 적을 만들어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릴 수 있다. 레임덕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노 대통령의 압박술은 그래서 양날의 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