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격정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그런데 너무 거침이 없었던 걸까. 노무현 대통령의 ‘12·21 격정 발언’ 파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이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그가 분출한 일련의 말들은 그에 못지않은 즉각적인 반발력을 키웠다.
“고건 전 국무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것이냐” “노무현 하는 것 반대하면 정의냐”…. 안보 정책에 관한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 중간 중간에 자신에 대해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자들에게 쏟아낸 이러한 강도 높은 발언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은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는 고건 전 총리의 성명, 전직 국방장관 및 예비역 장성들의 ‘군대 모독 발언’ 취소와 사과 요구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며칠 후인 12월26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제가 공격을 받았고, 참아왔지만 앞으로는 하나하나 해명하고 대응할 생각이다. 할 일도 열심히 하고 할 말도 다 할 생각”이라고 여전히 날선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할 말 한다고 국정이 결코 소홀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집권 4년을 보낸 시점에서 한껏 수위를 높인 노 대통령의 작심 발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러나 심리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의 심리상태를 찬찬히 뜯어보면 ‘들끓는 토로’의 근저에 자리한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 ‘가면놀이’에 익숙하지 못해”
“노 대통령에겐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자각이 없다. 따라서 그 지위에 걸맞은 역할 개념도 그에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노 대통령은 ‘야당 투사’만이 자신의 정체성인 걸로 여기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그간의 인생과 정치적 역정에서 사회화라는 과정 자체를 일상적인 규범의 틀을 거치지 않은 채 거의 홀로 체득한 인물이다. 게다가 노 대통령에겐 기존의 대통령들이 가졌던 역할과 행동 특성들이 늘 ‘타도의 대상’이었다. 이는 좋게 보면 권위의 타파로도 볼 수 있을 법하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가장(家長)이 대부분 그러하듯, 노 대통령에게도 누구든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정상적인 사고와 태도를 지닌 것이라는 신념이 자기 성공의 유일한 기제(機制)였다. 이는 곧 자기가 그동안 겪어온 경험의 틀을 뛰어넘기 힘들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음을 뜻한다. 그 결과 국민에게서 일반적으로 요구받게 되는, 통합과 안정을 강조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그 스스로 어떤 특정한 역할 모델을 ‘규정’했는데, 그것이 곧 ‘야당 투사’로서의 역할과 이미지를 고착하는 것이었다는 게 황 교수의 분석이다. 물론 이 같은 결과에는 ‘5년마다 벌어지는 거대한 로또복권 추첨 같은 대한민국의 불행한 대통령선거’의 문제점도 한몫할 수밖에 없었다. 황 교수는 최근 잇따른 노 대통령의 격한 발언들에 대해 콤플렉스에 젖은 ‘마이너리티(소수) 심리’에서 비롯된 생존술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노 대통령은 기가 세다. 깡이 있고 집요하다. 이는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다. 소수집단의 가장 훌륭한 적응전략은 상황 논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만큼 올인(다 걸기)하기도 쉽다. 과거사 청산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 외엔 다 ‘깽판’쳐도 괜찮다는 식으로 별무관심인 것을 보라. 2007년 대선 정국의 주도권을 자기가 잡기 위해서는 레임덕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란 자리가 과연 마이너리티의 것인가. 국가정책조차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노 대통령의 비극이자 우리의 비극이다.”(황 교수)
심리학 박사인 심영섭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는 노 대통령이 ‘가면놀이’에 익숙하지 못한 것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인권 변호사’ ‘청문회 스타’ 등의 전력에서 보듯 노 대통령에겐 분명 진정성이 있지만, ‘나라의 큰 어른’인 대통령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이 가진 이미지와 실제의 자아상(自我像) 사이에서 적절히 ‘가면’을 써야 할 경우도 생기는데, 노 대통령은 양자 간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그 결과 자신과 국민 사이에 미스커뮤니케이션(오해)이 생기곤 한다는 것이다.
심 대표는 또 노 대통령에겐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짙다고 말한다. 그의 부연 설명이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던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와 달리 노 대통령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어떤 모델이 돼준 게 아니라 그 스스로를 모델링했다. 그래서 그에게선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읽힌다. 세상이 곧 ‘나’이며, ‘나’도 나인 것이다. 그는 사법시험 합격으로 인생의 첫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어 또다시 대박을 터뜨렸음에도 국정 실패 등으로 이젠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처지에 놓였다. 격정 발언들은 그 진정성을 알아줬으면 하는 기대에서 내놓은 ‘감정폭탄’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모르는 게 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 국민들이 그를 구해낸 건 그에 대한 지지보다는 스스로 뽑은 대통령이 탄핵당함으로써 손상될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심 대표는 노 대통령이 남은 임기에도 끊임없이 뉴스거리를 생산해 주목받고자 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퇴임 후에도 칩거할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성이 부족한 성격의 소유자
건국대 의대 하지현 교수(정신과)는 노 대통령의 최근 발언들이 좌절감과 절박감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국정, 자신의 내면을 알아주지 않는 옛 측근들에 대한 야속함이 즉각적인 감정 분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무척 대조적인 인물이 히딩크다. 2002한일월드컵 이전 그는 ‘오 대 영 감독’이라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됐지만 괘념치 않고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주위에서 흔들어대도 자신만의 지도 스타일을 고수했다. 결국 그는 한국인에게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 임기 초 ‘검사와의 대화’에서 ‘막가자는 거냐’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지 않은가. 그의 발언들을 심리학적으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발언들로 인해 국민들이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다.”(하 교수)
익명을 요구한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고시 공부와 대선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노 대통령은 자기(自己)가 매우 강한 사람이다. 자신감이 강한 한편 타인의 비판에도 예민하다”며 “그런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의 확신이 약화되는 경우에 직면하면 남들보다 분노하기 쉽고, 그 강도도 훨씬 강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자성(他者性)이 부족한 성격의 소유자다”라고 분석했다.
‘왕따’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 ‘욕만 바가지로 먹고 산다’ 등과 같은 노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표현과 비속어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2004년 4월 노 대통령과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정치풍자 칼럼집 ‘너무한 당신 노무현(부제 ‘거짓말, 눈물 그리고 정치’)’을 펴낸 바 있는 고려대 현택수 교수(사회학)는 “사회화 과정에서 습득된 ‘막말’은 누구든 무의식중에 내뱉을 수 있다”면서도 “계산된 수사(修辭)에 능한 정치인이 그것의 부정적 영향을 예견하고도 반복한다면 ‘막말 발언’은 특정 지지층의 정서를 건드리기 위해 반쯤은 의도된 행위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뒤가 깨끗해야 좋은 술이지만 나는 술뿐만 아니라 사람도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다. 맞는 말이다. 국민들도 ‘뒷모습이 좋은 대통령’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