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8일 일심회 사건 2차 공판을 앞두고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에서 엄정한 재판을 촉구하고 있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 만든 비공개 모임입니다.”
“피고인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한 사실이 있지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자주를 추구하는 (주체사상의) 장점을 참고하려 했을 뿐입니다.”
지난해 12월28일 오후 2시20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재판장 김동오 부장판사) 417호 법정. 일심회 사건의 핵심 인물인 장민호(미국명 마이클 장·44) 씨는 12월21일의 첫 공판에 이어 이날 열린 속행공판에서 검사의 빗발치는 신문에 일부 혐의사실을 제외하곤 연신 에두른 답변으로 일관했다.
법정은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소란을 피웠던 첫 공판 때와 달리, 보수단체 회원들이 주를 이룬 방청객 200여 명이 자리를 빼곡히 메운 상황. 매운 바깥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이번 재판을 둘러싼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일심회 핵심인물 장민호 씨.
장씨는 우선 입북 사실,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난 사실, 북한 측으로부터 제공받은 홍콩 내 사서함과 e메일을 통해 북측과 접촉한 사실 등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비밀지령’이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 것이며, 그 활동내용도 북측에 ‘보고’한 것이 아니라 (북측과) ‘대등한 관계’에서 ‘개인적 견해’를 ‘제시’하거나 ‘전달’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일심회라는 명칭 역시 개인적으로 편의상 명명(命名)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만난 북한 공작원을 ‘북측 인사’로 불러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보수단체 한때 격앙 법정 소란
장씨는 일심회 사건에 연루된 사업가 손정목(42) 씨가 국내 정세 동향을, 정보기술(IT)업계 종사자 이진강(43) 씨가 일부 시민단체 동향을, 이정훈(43) 씨가 민노당 서울시당 관련 동향을 수집하는 등 역할분담을 한 것은 인정했지만, 수집된 정보를 문건으로 전달받은 혐의에 대해선 극히 일부만 받아들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함께 구속기소된 민노당 사무부총장 최기영(40) 씨와 민노당 관련 혐의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는다” “시점을 잘 모르겠다” “추후 기억을 추슬러 보겠다”는 말을 수십 차례나 되풀이했다는 것. 더욱이 장씨는 “피고인이 직접 작성했거나 피고인의 집에서 압수한 플로피디스크의 대북 보고 문건에 들어 있는 내용인데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 검찰 수사 당시 인정한 내용까지 부인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컴퓨터) 저장장치를 (수사과정에서) 임의 복구할 때 새로 나타난 문건일 것으로 추론되므로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문건 내용 일부에 작성자들의 과장된 표현이 섞인 것 같다”며 선을 그었다. 장씨는 특히 최씨를 직접 만난 사실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장씨의 이 같은 태도는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을 격앙케 했다. “몽둥이로 때려야 기억이 나겠냐” “간첩은 개과천선하세요”라는 등 야유가 쏟아졌고, 이 과정에서 한 보수단체 회원은 재판장에 의해 퇴정당하기도 했다. 이들과 장씨 변호인 사이에 감정적인 말싸움까지 벌어져 재판은 15분이나 지연된 터였다.
간첩 혐의라는 지극히 중대하고도 민감한 실체적 진실이 규명돼야 할 엄정한 법정이 여전히 첫 공판 때와 마찬가지로 이념 충돌의 장(場)으로 변질되는 동안에도, 장씨의 ‘기억’은 복원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심회 사건 재판이 ‘머나먼 정글’을 향하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