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걸음이 남도로 향했다. 전북 정읍시와 전남 장성군의 경계에 자리잡은 갈재를 넘어 접어든 곳은 전남 화순군 능주면. 멀리 무등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능주는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린 채 한가롭기만 하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개혁 사상가였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고장. 그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휘말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은 곳이 바로 능주면 남정리다. 지금도 지역 곳곳에는 조광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재이자 당대의 풍운아였던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도 적잖이 전해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광자(狂者·미친 사람) 혹은 화태(禍胎·화를 낳는 사람)라고 불렀다 한다. 적당히 머리 조아리며 요령껏 사는 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홀로 원칙을 지키려 하는 그를 미덥지 않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앞장서 실천하는 이는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대 천재이자 풍운아 … 원칙 실천 ‘미친 사람’ 취급
하지만 조광조가 초년 시절부터 ‘광인’으로 일컬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젊은 날은 승승장구의 연속이었다. 평북으로 귀양 가 있던 김굉필에게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성리학을 배운 그는 성리학만이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라고 확신했다. 어린 나이에 관직에 등용된 뒤에는 중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고, 30대 젊은 나이로 사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헌에 오르면서 개혁의 강도를 높여나갈 때까지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 가운데 흠이 있는 사람들을 골라 명단에서 빼려 한 ‘개혁 작업’이 훈구척신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조광조 천하는 막을 내리고 만다.
조광조가 최후를 맞이한 유배지에 세워진 사당 전경.
훗날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하늘은 그의 이상(理想)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아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가 창건한 쌍봉사 전경.
조광조의 유배지에는 우암 송시열이 그를 기려 세운 ‘조광조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고, 그가 거처했던 초가집 안 사당에는 조선 선비 같은 조광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한 점이 모셔져 있다.
사실 능주는 조광조가 유배 오기 훨씬 전부터 명맥을 이어온 고장. 백제시대 이 지역의 이름은 이릉부리(爾陵夫里) 혹은 죽수부리(竹樹夫里)였다. 신라 이후 능성현(綾城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초기에는 나주, 조선 태종 16년에는 순성현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인조 10년인 1605년에는 대비 인헌왕후 능성 구씨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로 ‘능주목’으로 승격돼 한때 번성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에 의해 화순군에 편입된 뒤 면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지금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남정리 냄평(남평)거리를 거닐고 있다. 정자가 있어 ‘정재물’이라고 불렸던 이 마을은 능주성의 북문이 있어 ‘북문거리’라고도 했다는데, 오늘날 북문이나 정자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구름만 껴도 물이 불어난다’고 하여 ‘구진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도 이제는 당시의 풍광을 잃어 아무리 비가 와도 큰 피해를 볼 것 같지 않은 모양새다.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
자연스레 발걸음은 남정리를 지나 관영리에 이른다. 관영리는 능주목의 관청이 있던 곳으로, 번성했던 능주의 중심지였다. 지금의 능주면사무소 자리에 능주현의 관아가 있었고, 동헌에는 능주목의 정문인 죽수부리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자리에 있던 ‘봉서루(鳳棲樓)’의 경관은 유명해서, 조선 전기 문신 성임은 누각에 오른 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날마다 달려 잠시도 한가하지 못한데, 여기 오르니 다시 한번 근심스런 마음 풀리네, 마을이 바다에 가까우니 봄은 항상 이르고, 소나무와 대나무에 닿았으니 여름에도 춥네. 발을 걷으니 산 빛이 그림기둥에 침노하고, 햇살이 비끼니 꽃 그림자가 난간에 올라오네. 길손 되어 무한히 집을 생각하는 마음, 글 구절을 가지고 억지로 스스로 위안하네.’
‘비운의 천재’ 조광조의 한이 서려 있는 능주 전경.
‘연주산 위의 달은 소반 같은데, 풀과 바람 나무 없고 이슬 기운 차네. 천 뭉치 솜 같은 구름 모두 없어지려 하고, 한 덩이 공문서도 보잘것없다. 시절은 다시 중추(中秋) 아름다운 것을 깨닫겠는데, 길손의 회포 누가 오늘 밤 위안될 줄 알았으리. 갈 길은 또 서쪽 바다 따라 돌아가나, 손가락 끝으로 장차 게 배꼽이나 뻐개리라.’
영벽정 건너편 산 아래에는 조광조를 모신 죽수서원이 있고, 연주산 자락에서 바라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능주의 진산인 운산이 제대로 보인다.
죽수서원의 돌 계단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해장죽(시누대) 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고 오는 세월을 회상하다가 지석강의 발원지인 쌍봉사로 향했다. 쌍봉사는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가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그런 탓인지 가장 빼어난 신라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57호) 등 그와 관련된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깊은 신심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부도 옆에는 보물 제170호로 지정된 ‘철감선사 부도비’가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서 있다. 이 절에는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목탑인 대웅전(당시 보물 제163호)도 있었는데, 84년 4월 초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지금 새로 복원된 탑이 서 있지만 아쉽기만 하다.
가볼 만한 곳
능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가는 길과 나주에서 능주로 가는 길 등이 편하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와 나주군 다시면의 불회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지석묘 등이 일대에 산재해 찾기 쉽다. 능주역 앞 송원숯불갈비(061- 373-9165)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