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7개월에 접어든 장차현실씨와 ‘장애가 있는 멀쩡한 딸’ 은혜.
출산이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기에 여성들은 망설이며 종종 두려움마저 느끼곤 한다. 나처럼 직업을 가진 여자는 일과 가사라는 이중고를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출산을 결정하기가 더욱 어렵다. 여자들의 ‘집안일’이란 실상은 살림과 육아·노인 부양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만들어내고 지켜가며 경제라는 거대한 산을 지탱하는 근본임에도 대가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하고 있다. 출산은 바로 그 ‘집안일’ 속으로 자신을 온전히 투여하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어서 큰 각오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어미 될 것을 결심하는 이유는 새 생명에 대한 경외와 건강한 자신의 분신을 보고 싶은 갈망 때문일 것이다.
10여년 전 나는 남편과 헤어지고 ‘한 부모(1인 부모)’가 됐다. 이전의 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와 나의 일, 주변의 몰이해와 갖가지 현실의 벽 앞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장애 아이 가진 이혼녀 ‘현실의 벽’으로 고통
내 생각은 아이가 생겨도 당연히 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에도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여전히 일을 하며 살아온 나였다. 그런 만큼 일하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아이에게만 헌신해서는 만족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포기의 이유를 아이에게 두며 깊이 원망하지는 않을지…. 그렇게 되면 난 진정 아이가 사랑스럽지만은 않을 것이고, 많은 것을 포기한 채 맥 빠진 엄마 밑에서 자라는 아이 또한 건강한 삶의 기대감을 갖기는 어려우리라 판단했다.
나는 억척스럽게도 아이를 둘러메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받아주는 어린이집을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 늘 아이를 업고 한쪽 어깨에는 기저귀 가방을, 다른 쪽에는 일과 관련한 가방을 둘러메고 양손엔 작업한 그림을 든 채 뛰어다니기 일쑤였다. 난 항상 바쁘고 지쳐 있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할 줄도 몰랐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이의 장애를 엄마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거스를 힘이 젊고 어린 그때의 나에게는 아직 없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행복하게 살자고 시작한 결혼이었지만 내 어려움은 덜어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만 커져 갔다. 결국 한 부모가 되기로 결정했고, 혼자 사는 여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의 편견을 견뎌내는 것 외에는 남편의 빈자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았다. 그 결과 장애 및 여성을 주제로 한 만화작업을 각종 출판물에 연재하는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쉽고 편한 길은 아니었다. 집안일을 돌보며 생산도 하는 홈 워킹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고용 보장을 받을 수도,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도 없다. 게다가 집안일과 아이 돌보기, 일이 혼재한 상태에서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되지 않아 늘 근무 중인 것 같은 피곤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고난 속에서 나의 곁을 지켜준 것은 딸 은혜였다.
은혜의 장애, 비정상….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비록 생명이라 해도 암묵적으로는 버려야 할 무엇으로 치부되곤 한다. 정상이라 규정된 사람들의 건강과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소외와 폐기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장애가 있는 딸을 키우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눈길이 그저 고맙지만은 않다.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오히려 은혜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은혜로 인해 나는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뱃속 아이 아빠는 ‘동거인’ … 행복한 출산 기다려
아이를 통해 나누는 삶을 알게 됐고,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게 됐으며, 정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인식의 폭을 넓혀갈 수 있게 됐다. 인생의 비극을 애써 덜어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내 삶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우리 모녀의 결속감은 어떠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게 했으며, 적게 가지고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은혜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나는 엄마 됨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됐다. 환경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결국 행복하고 싶은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열망의 또 다른 결과일까?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7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뱃속에서 고물거리며 분주하게 세상공부를 하고 있다. 뱃속 아이의 아빠는 나의 ‘동거인’이다. 은혜와 나, 그이, 그리고 ‘미혼모’인 내 뱃속의 아이는 비록 법적으론 아무 인정도 받지 못하나 서로 꼭 있어야만 하는 사랑으로 뭉친 가족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우리 가족의 모습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나와 그이는 ‘내용을 채우지 못하는 형식’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관계의 자신 없음’을 법이라는 것으로 묶어놓고 방심하며 살지는 말자는 것이다. 동거의 문제는 호주제가 없어진 후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난 이러한 우리 가족 이야기를 모 주간지에 가족만화로 연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히 이야기하는 나도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그 당혹감 속에는 분명 반가움이 있었다. 아이는 부모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 된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를 찾아준 아이의 선택을 반갑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차현실씨 모녀와 ‘동거인’ 서동일씨(맨 왼쪽).
내가 사는 곳은 버스가 하루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시골이다. 아이를 키우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고령화 사회를 염려하고, 마치 부속품 생산을 독려하듯 생산인구 증가를 위해 출산장려 캠페인을 벌이는 요즘, 그러나 우리 동네는 노인이 죽어도 장례 치를 수 있을까 걱정하는 곳이다. 노동하지 않는 어르신이 없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 빈자리에 노인 아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미래가 있는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둘째 아이를 낳아 또 한번 나의 행복을 부풀리며 살아갈 것이다.
어제는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와 태아 환영식을 했다. 모두가 손잡고 서서 내 안에서 자라는 아이가 세상에 왔음을 축하하고 아이의 건강을 빌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듯한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우리가 꿈꾸는 희망의 미래를 보았다. 어울려 사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날이었다.
장차현실씨는?
1964년생. 1988년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장애가 있는 딸을 둔 어머니로서 ‘여성’ ‘장애’를 화두로 그림을 그린다. 몇몇 매체에 ‘별 아이 현실엄마’ ‘작은 여자 큰 여자’ 등의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 먹자’ ‘마님난봉가’ ‘색녀열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