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유학생’들이 한 학원에서 국내 대학의 진학을 위해 강의를 듣고 있다.
2004년 1학기 연세대 수시모집에서도 ‘돌아온 유학생’들의 돌풍이 화제를 모았다. 하버드 대학 등 미국 명문대에 합격한 외국 고교생 6명이 이 대학에 지원, 합격한 것. 의예과에 합격한 권수영양은 하버드 대학 입학허가서를 받았지만 연세대를 택했고, 차소연 양버들 김지희 이주현 진수연양은 각각 미시건 대학과 버지니아 대학, 코넬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등 명문대 입학허가서를 받고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기 유학을 통해 현지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겼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미국 고등학교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오종현양(큰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올해 이화여대 국제학부에 합격했다.
최근 조기 유학생들의 잇따른 유턴 현상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학 부적응자들의 ‘회군’이 아니라, 우수 학생들의 ‘선택’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은 첫 번째 유학에 훌륭하게 적응한 뒤 더 좋은 학업 조건을 위해 돌아오는 유학을 감행했다고 하여 ‘역유학생’이라고 불린다.
특례입시 전문학원인 세한아카데미 김철영 원장은 “조기 유학생들의 역유학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요즘 날로 확산되고 있는 하나의 ‘경향’”이라며 “조만간 조기 유학 뒤 한국 명문대에 진학하는 코스가 최고의 영재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기 유학생들이 한국의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이유는 인생의 ‘커리어 플랜’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한국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일부 언론들이 이들의 선택을 ‘애국심의 발로’인 듯 치켜세우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모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는 이화여대 국제학부의 수업 모습.
이들이 돌아와야 할 경우, 가장 좋은 시점은 한국에서 학맥과 인맥을 쌓아 취업 등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고교, 대학 입학 시기다. 유학 전문업체인 동아지오넷의 한상범 오세아니아 지사장은 “명문고, 명문대 인맥이 공고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비리그 출신보다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약칭) 출신이 더 대접받는다”며 “유학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유학파’라는 이유만으로 대접받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현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 한 증권사에 취업했다가 연세대 경영대학원 ‘글로벌 MBA’ 과정에 입학한 헬레나 김씨의 사례는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김씨는 “한국 명문대 출신이 많은 우리 회사에서 외국 대학 출신자는 찬밥 신세였다. 번번이 한국 사회의 인맥·학맥의 벽에 부딪혀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적 ‘배경’을 갖춘 뒤 다시 증권사에 입사하기 위해 연세대 대학원을 택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이 역유학생을 선호하는 것도 최근의 트렌드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현지화 전략을 구사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단순 유학파’보다 ‘외국어에 능통한 한국형 인재’를 선호한다. 한국 IBM의 인사담당자는 “외국 기업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을 상대로 영업하는 만큼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필요하다. 외국 생활을 통해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한국 사회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인재가 채용 1순위”라고 전했다. 바로 역유학생들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을 거점 삼아 동남아 등 새로운 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본사의 문화와 한국 상황에 모두 익숙한 ‘역유학파’들의 활동 공간은 한층 넓어질 수밖에 없다.
중고교 시절 1~2년 동안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공부한 뒤 한국 고교로 돌아오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STS 재단의 김효상 팀장은 “명문대 출신 학부모일수록 한국 사회에서 ‘동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기 때문에 자녀에게 한국 명문대 진학을 권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영어 면접 광경.
각 대학 국제학부 관심 폭증
2005학년도 입시에서 이화여대 국제학부에 합격한 오종현양은 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뒤 미국 미주리주의 한 고등학교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돌아온 케이스. 그는 입학 과정에서 미국 학교의 내신 성적을 인정받았고, 수능 성적 없이 영어 에세이, 영어 인터뷰 등의 시험을 통해 이화여대에 합격했다.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이화여대 국제학부는 전체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며, 신입생 선발시 수능 성적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 ‘외국 체류 경험’이 지원 요건이 아님에도 2001년 첫 신입생 30명의 평균 해외 체류기간이 7년이었을 정도로 외국 유학생들의 역유학 기착지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학부장 박인휘 교수는 “국제학부 학생들은 대학 4년 동안 외국 대학과 똑같은 시스템 아래서 교육받기 때문에 유학생의 장점과 한국 명문대 출신의 장점을 고루 갖추게 된다”며 “대학의 국제 경쟁력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국제학부에 대한 지원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앞으로 국제학부 졸업생들은 국내외 모두에서 인정받는 인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화여대 국제학부가 한국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조기 유학생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국제학부는 최근 몇 년 새 고려대, 한양대, 경희대 등 명문 사립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연세대도 2006년부터 세계 명문대와의 교류 등을 내세운 ‘언더우드 국제학부’를 만든다고 발표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조기 유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앙대 사진학과 3학년 김모군은 “나는 고등학교 시절 자유를 포기한 채 내신 공부와 수능 시험에 매달렸는데, 유학을 다녀온 친구는 영어 실력만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더라”며 “그 친구는 이제 취업과 사회 생활에서도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2월 고려대를 졸업한 최모씨(26)도 “영어 실력이 가장 중요한 가치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국내파는 아무리 착실히 공부해도 설 자리가 없다”며 “앞으로 유학생들이 더 많이 들어올 텐데 후배들이 걱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무장한 역유학생들이 외국어고와 자립형 사립고 입시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조기 유학→귀국→명문고→명문대’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급’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기 유학생들 가운데 한국에 돌아와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과 내신 성적을 갖춘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한국 학생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한 것”(오종현양)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이화여대 국제학부의 경쟁률은 매해 15대 1을 넘나든다. 오양은 “오히려 최선을 다해 공부한 뒤 고국에 돌아온 학생들이 ‘외국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터부시되는 것을 느끼면 상처받을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김철영 원장은 “외국에 나갔다 온 학생들이 편하게 과실을 따먹는다고 보는 것은 국내파들의 편견”이라며 “실력 있는 조기 유학생들의 역유학은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이제 우리는 그들의 재능을 우리나라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