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시 의장(맨 왼쪽)이 경제 5단체장과의 간담회 시작에 앞서 김재철 무역협회장(맨 오른쪽)과 악수를 하고 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판결이 난 다음날인 5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당초 원고에 없던 부분을 가필하면서까지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 노대통령은 이어 “공공부문과 시장부문이 혁신돼야 한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들어야 다시 살고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며 집권2기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재계는 술렁댔다. 17일로 잡아놓았던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한 종합건의서 정부 제출을 보류하는 등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좀더 두고 보자는 것이다.
“깜박이는 좌(左)로 켜고 가기는 우(右)로 갈 거다.”
노대통령 담화 발표 전날 만난, 한 그룹 구조조정본부 임원이 한 말이다. 그의 발언에는 현 정세에 대한 재계의 ‘속생각’과 ‘희망사항’이 모두 포함돼 있다. “재벌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청와대, 내각은 물론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에도 강력한 우군이 많지 않느냐”는 것이다.
재계의 이러한 양면적 현실 인식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겁먹고 있다. 총선을 통해 개혁이 대세라는 게 다시 한번 확인됐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이정우 대통령정책특별보좌관,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 정권 내 경제개혁 세력도 건재하지 않나. 특히 민주노동당의 10석 확보는 위협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 한 인사의 토로다. 그럼에도 “결국엔 우로 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는 우리당 발(發) ‘실용주의’ 바람이 큰 몫을 차지한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한 우리당 홍재형 신임 정책위의장의 잇단 발언이다.
양자간 충돌 화두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홍의장은 5월12일 재정경제부와의 당정협의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추진 중인 대기업집단(그룹) 소속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방침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해 파란을 일으켰다. 논란이 일자 홍의장은 다음날 “공정위 추진 방향이 맞다.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뜻은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우리당의 실용주의 노선은 경제개혁을 외쳐온 진보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우리당이 벼락부자 몸조심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함께 민생경제와 경제회생을 내세우면서 애매모호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또 하나 재계의 힘을 북돋우고 있는 것은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박봉흠 청와대 정책실장이 이끄는 현 정부 경제팀에 테크노크라트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현재 재계와 경제개혁 세력 간 충돌의 화두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그룹의 금융·보험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 비율 축소, 출자총액제한, 부당내부거래 계좌추적권 재도입 등이 골자다. 이는 재벌개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중 금융 계열사 의결권 제한은 지난해 말 정부가 재계와 협의·확정한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법안 개정을 앞두고 재경부가 돌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요즘 이부총리는 재계로부터 ‘홀로 외로운 전투를 벌이는 진정한 시장친화주의자’라는 찬사까지 듣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가 쉬 재벌개혁에 나설 수 없으리라 보여지는 다른 이유는 참여정부의 경제기조가 지방 활성화를 위한 산업정책에 맞춰져 있는 점이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예를 들어 울산시에 조성 중인 ‘오토 밸리’의 경우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클러스터 정책의 첫 시험대와 같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야 할 현대자동차가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총선 후, 특히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수면 위로 떠오른 5월 초부터 전경련 등 재계가 재벌개혁 저지를 위한 총공세에 돌입한 데에는 이상과 같은 배경이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 출신의 한 재계 유력인사는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지금이 위기이건 마지막 기회이건 여기가 마지노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물경제 이헌재 팀 VS 분배·복지 이정우 특보 ‘파워 게임’
마지노선이란 공정거래법 개정안 중 출자총액제한과 계좌추적권 재도입은 감수하더라도,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만큼은 최소한 시행 연기 및 의결권 행사 축소비율 상향 조정(공정위의 15%안을 25% 또는 20%로) 결정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재계의 이런 의도는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공정위 관계자는 “재경부와의 협의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재계만 해도 ‘3개년 로드맵’ 확정 당시 이미 (논의가) 다 끝난 상황을 정치적 격변기를 기회 삼아 뒤집으려 하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만큼 큰 압력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2003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정우 당시 정책실장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부총리 입각 후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이헌재 펀드’, 즉 사모주식투자펀드(PEF)다. 재경부가 5월5일 발표한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안은 ‘산업자본이 10% 미만의 비율로 참여할 경우 PEF의 은행 인수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벌이 금융을 간접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장은 “재벌은 PEF를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의 대체 제도로 활용하려 한다”며 “어떠한 명분으로도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는 허용돼선 안 되며, 이는 노대통령의 공약에도 위배된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을 둘러싸고 공정거래위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헌재 경제부총리.
이와 관련, 이정책특보로 대표되는 정권 내 경제개혁 세력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으로 노·사·정 간의 이른바 ‘사회 대타협’을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정책특보의 측근인 정태인 동북아균형발전위 기획실장은 5월11일 한 토론회에서 “개인적으로 사회 대타협이 유일한 살 길이라고 본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만약 대통령이 우리 쪽 얘기를 들어준다면 사회적 협약을 기치로 내걸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도 했다.
어쨌든 노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개혁세력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일단 깜박이는 ‘좌’로 켠 것이다. 깜박이 켠 그대로 갈지, 아니면 재계의 희망 섞인 추측대로 ‘우’로 갈지는 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한 진보 경제학자는 “노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주의’란 당과 정부, 청와대의 노선 통일이 아니라 각기 맡은 분야에서 자기 방식대로 일하고 조절은 대통령이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며 “그러나 재벌이 ‘대타협’에 나설 이유가 있나. 또 계급적 이슈는 건드리지 않은 채 기초생활보장법 등 분배·복지 파트’만 개선한다고 해서 개혁이 이루어지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