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1959년작. ‘전쟁과 평화’의 감독 킹 비더가 연출한 대작 시대극으로 율 브린너와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주연을 맡았다.
살롬은 ‘평화’라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의 쟁투적인 삶과 대조적인 뜻의 이름을 막내아들에게 붙여주었다. 자기처럼 전쟁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지 말고 백성들과 함께 태평성대를 누리라는 의미로 그러한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평성대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어서 무수한 전쟁을 치른 연후에 비로소 얻게 되는 평화와 함께 도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살롬은 단순히 한가롭고 평온한 상태를 뜻하기보다 수많은 갈등과 투쟁을 겪은 뒤에 찾아오는 평화를 뜻한다. 히브리인들이 서로에게 살롬이라고 인사할 때는 그런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살롬과 비슷한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주고받는데 그 안녕도 소극적인 편안만을 뜻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연 솔로몬은 그 이름 그대로 다윗이 이루어놓은 터전 위에 평화로운 시대를 이룩했다. 다윗으로 인해 군사 강대국이 된 이스라엘을 주변 국가들은 쉽게 넘볼 수 없었다. 오히려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눈치를 보며 솔로몬에게 잘 보이려고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르자 이집트 파라오는 자기 딸을 솔로몬의 아내로 내주었다. 이때의 파라오는 제21대 왕조의 끝에서 두 번째 파라오에 해당하는 시아문이다. 왕조가 몰락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파라오는 솔로몬과 동맹관계를 맺기 원했을 것이고 솔로몬 역시 이집트와 손을 잡으면 외교 면에서 여러 가지로 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경에 보면 파라오가 가나안 족속들이 모여 사는 게셀 지역을 탈취해 솔로몬의 아내가 된 딸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딸의 결혼 지참금조로 그 지역을 솔로몬에게 바쳤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도 파라오가 이스라엘 지경(地境)에 있는 게셀로 쳐들어와 그것을 차지하고 있다가 솔로몬과 사돈을 맺으면서 화해와 동맹의 표시로 반환해주었던 것 같다.
아내로 맞은 파라오의 딸 위해 화려한 궁 건축
이집트 역사를 살펴보아도 파라오가 자기 딸을 이방 왕의 아내로 준 적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시아몬은 뭔가 다급했음이 틀림없다.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영토 분쟁까지 해결하는 이득을 보았다. 이 파라오의 딸은 왕실의 후예답게 우아하고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왕후들 중에서 파라오의 딸이 가장 눈에 띄었을 것이고 솔로몬은 그녀를 위해 특별히 따로 궁을 짓기도 했다. 열왕기 상 9:24에 보면 ‘바로의 딸이 다윗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더라’고 했다. 이와 같이 솔로몬의 치적을 언급할 때도 바로의 딸과 관련된 구절이 나올 정도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13년 동안 자신의 왕궁을 지었다. 특히 파라오의 딸을 위한 궁을 짓는 데 마음을 썼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두로(Tyre) 지역에서 운송된 레바논 백향목으로 최대한 웅장하고 화려하게 궁을 지어 파라오의 딸을 흡족하게 해주려고 했다.
또한 스바 여왕이 외교사절을 거느리고 솔로몬을 예방하여 선물을 전달하고 국교를 맺는 사건이 중요한 비중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바는 사베인들이 아라비아에 건설한 국가로 지금의 동부 예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사베인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으나 정착하여 왕국을 세운 뒤에는 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스바의 신(위)을 모시는 ‘스바신 축제’에 참석한 소녀들.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웅장한 성전과 왕궁을 스바 여왕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압도해버렸다. 무엇보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자신의 지식과 지혜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드러내보임으로써 그녀가 솔로몬을 존경하고 흠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개인적인 매력과 국가적인 위용을 잘 활용하여 스바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라비아 통상외교에 성공한 셈이다.
스바 여왕은 그 모든 것에 감탄해 칭찬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지혜에 대해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했는데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가 들은 것은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소문을 훨씬 넘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외교 역사상 이만큼 훌륭한 수사(修辭)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솔로몬 역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매력에 끌린 솔로몬과 스바 여왕 사이에 무슨 일이 더 있었는지는 짐작만 할 따름이다. 낮의 외교와 밤의 외교는 그 양상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때 국가간의 외교에서도 성적 매력을 포함한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은 이집트와 스바뿐만 아니라 모압과 암몬, 에돔과 시돈, 헷 지역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 지역 출신 여자들을 후궁으로 많이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후궁들을 고를 때도 지역 안배를 한 셈이다.
후궁, 즉 후비만 해도 700명이나 되고 그 다음 서열인 빈첩은 300명이나 되었다. 각 지역에서 1000명의 여자들을 골라 데리고 살았으니 솔로몬은 정력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성적 타락으로 수많은 복 제 발로 차버린 격
무엇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본토 여자들보다 이방 여자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본국 여자 기피증’ 증세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솔로몬은 유별날 정도로 이국 여자들을 좋아했다. 솔로몬의 증세를 굳이 이름붙인다면 ‘섹슈얼 이그조티시즘(sexual exoticism)’이라고 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스라엘 인근 나라들의 여성의 매력은 필설로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시리아, 요르단 등 근동 지역 여자들은 남자들이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반할 지경이다. 그들이 이슬람 전통에 따라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자들은 늘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지냈을 것이다.
매혹적인 여성은 남자에게 에덴의 선악과 나무와 같은 것이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먹음직하고 봄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인간에게는 낙원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있는 반면 실낙원에서 살고 싶은 욕망 또한 있는 법이다.
여호와도 이스라엘 인근 여자들이 뇌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여자들을 조심하고 멀리할 것을 누누이 경고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러한 여호와의 경고를 착실하게 지킨 시대가 별로 없다.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마음에 들어 축복을 한없이 받은 솔로몬조차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방 여자들에게 빠졌으니 일반 백성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쩌면 솔로몬은 여호와의 복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방자해져서 수많은 이방 여자들과 놀아났는지도 모른다. 결국 받은 복들이 ‘축복이라는 이름의 저주’가 된 셈이다.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복을 잘 간수하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후자가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받은 복을 팽개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성적 타락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사실을 솔로몬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