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 천사가 성모마리아에게 성령에 의한 잉태를 알려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포르노이’라는 최하급 매춘부 그룹과 ‘헤타이라’라는 고급 창녀 그룹이 있었다. 포르노이와 헤타이라 사이에도 여러 계층이 있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고기 썰기, 다리의 여인, 달리는 여자, 갇힌 여자, 암늑대, 주사위, 구더기 단지 등 그 이름도 유별났다.
이런 이름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사회는 매춘을 지극히 당연한 생업으로 여겼고 많은 도시국가들이 매춘 종사자들의 수입에 세금을 매겼다. 그 세금으로 아프로디테 신전 같은 건물을 세우기도 했으니 매춘이 얼마나 공공연히 시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매춘세만을 징수하는 전담 세무공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매춘 근절 안 돼 은근히 방치
그러나 그리스 문화와 대조를 이루는 헤브루 문화에서는 매춘이 공식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제사장의 딸이 매춘하는 경우에는 화형을 시키도록 했다. 특히 매춘부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극히 경계했다. 그런 매춘부를 따라가는 청소년에 대해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도살장)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화)살이 그의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고, 재빠르게 그물로 들어가는 새가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하지만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매춘이 근절되지 않았고 결국 필요악 정도로 여기며 은근히 방치하기에 이르렀다.
매춘의 원형을 종교적인 예배의식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 신전에는 마르둑(바알이라고도 함) 신의 성교를 위한 특별한 방이 가장 높은 탑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방에는 커다란 소파가 놓여 있었고 신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선발된 여자가 밤마다 소파에서 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나 그 화신이 나타나 여자와 교합을 했다고 하는데 신의 화신이라고 하는 자들이 신전을 찾아온 남자들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모든 여성들은 일생에 한 번은 밀리타(이쉬타르라고도 함) 신의 신전에서 여사제 역할을 하며 낯선 남자와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남자들은 여자의 무릎에 은화를 던져 일종의 헌금을 한 후에 여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매춘을 신성매춘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방문화와 종교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에도 신성매춘이 들어왔으나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여성이 신전 밖에서 매춘을 하여 신전에 바치는 사원매춘은 근절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신전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사원)을 가리킨다.
예수의 족보에서 중요한 조상의 위치를 차지하는 유다는 아내가 죽어 홀아비가 되자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의 창녀와 관계를 맺는다. 새 아내를 구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도 될 것을, 양털 깎으러 간 딤나 지방에서 서둘러 사창가를 찾는 그를 보면 꽤나 급했던 모양이다.
파리의 에로티시즘 박물관(왼쪽). 남성을 유혹하고 있는 파리 매춘부들의 모습.
그런데 유다가 딤나 지방 에나임 문 앞 거리에서 만난 창녀는 사실 창녀가 아니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었다. 다말은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했는데도 유다가 수혼(嫂婚·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에게 장가드는 제도)의 관습을 따르지 않자 일부러 창녀로 변장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받아서라도 남편 엘의 후손을 이으려고 했던 것이다.
비정상적 관계로 인한 출생시 여자 이름도 족보에 언급
유다는 화대로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하며 그 약조물로 자신의 도장과 지팡이를 여자에게 맡겼다. 선불인 화대 대신에 일종의 어음을 끊어준 셈이었다. 딤나에서 집으로 돌아온 유다는 친구인 아둘람 사람 편에 화대인 염소 새끼를 여자에게 보내고 자신의 도장과 지팡이를 찾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딤나 지방에 그런 창녀는 없었다. 딤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들 지방에는 창녀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했다.
유다는 도장과 지팡이를 찾기 위해 창녀를 수소문하는 것이 창피하기도 해서 그 일은 없었던 일로 묻어두려 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후, 친정집에 가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유다에게 들려왔다. 유다는 다말이 외간남자와 간통한 줄 알고 다말을 끌어다가 불에 태워 죽이라고 했다. 유다 앞에 끌려나온 다말에게 유다가 물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와 실패’(위). 예수와 가롯 유다.
“이 도장과 지팡이의 임자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내놓는 도장과 지팡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결국 유다는 다말에게 셋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고 다말을 화형시키도록 한 명령을 취소했다. 그러나 이미 임신을 했으므로 굳이 유다는 셀라와 결혼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고, 다말의 영악함에 질렸는지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해산할 때가 되어 다말이 아이를 낳았는데 산파가 보니 쌍둥이가 아닌가. 그래서 산파가 장자를 구별하기 위해 먼저 나온 아이의 손에 붉은색 실을 묶어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고 뒤에 있는 아이가 앞질러 나오고 말았다. 그 아이를 ‘베레스’라고 불렀는데 ‘헤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나오려고 앞에 있는 아이를 헤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베레스 다음에 나온 아이는 세라라고 불렀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라는 구절이 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잉태된 불륜의 씨가 버젓이 예수 족보에 실려 있는 것이다.
예수 족보는 보통 ‘누가 누구를 낳고’ 식으로 이어지는데 ‘누가 누구에게서 누구를 낳고’ 식으로 표현하는 대목이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런데 그 네 번 다 비정상적인 관계에서의 출생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가 유다와 다말에 관한 언급이고, 두 번째가 ‘살몬이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이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도운 여리고의 기생이었다. 세 번째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이다. 다윗이 신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하여 솔로몬을 낳은 것이다.
네 번째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이다. 예수의 경우는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요셉의 피가 섞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정상적인 관계에서의 출생일 때만 여자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근친상간에 가까운 불륜, 간통 등으로 태어난 자들도 예수의 족보에 실려 구속사(救贖史)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는 인간의 도덕적인 판단을 뛰어넘고 있음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