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샤론 총리(오른쪽)는 중동질서 개편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에 현재까지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련의 변화들은 ‘중동지역의 WMD 안전지대화’라는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이스라엘이 이러한 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게 고민의 주요 이유다.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이 리비아와 이란의 조처를 따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고, IAEA(국제원자력기구)·NPT(핵확산 금지조약) 같은 국제기구 또한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핵무기에 관한 한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그 존재 여부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NPT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IAEA의 핵사찰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핵무기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발견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의심만으로 풍비박산이 난 이라크와 비교하면 대단한 특혜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특혜는 1969년,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와 미국 대통령 닉슨 사이에 맺어진 비밀조약에 기인한다. 이 비밀조약에서 닉슨은 이스라엘이 핵실험을 통해 핵개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이스라엘이 먼저 중동지역에 핵무기를 소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NPT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묵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그동안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해 자유로이 핵개발을 할 수 있었고, 끊임없는 핵사찰 요구에 당당히(?) 불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힘 앞에 주변국들 무장해제
핵에 관한 한 이스라엘의 입장은 단호하다. 핵을 전쟁억제 전략과 국가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었던 이집트와의 평화협정이 가능했던 것도, 1991년 걸프전 당시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향해 생화학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실제로 만일 이스라엘과 남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다른 아랍국들의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아랍국 중 가장 먼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1978년)했으리라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적어도 이스라엘 내에서는 핵 포기에 대한 주장은 나오지 않는다. 설령 주장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좌파성향의 언론이나 평화주의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중동지역의 WMD 안전지대화 논의가 물위로 떠오른 뒤 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언론도 ‘핵에 관한 한 현재 정책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WMD가 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화학무기 및 이를 운반하는 장거리 미사일 또한 이에 포함된다. 이들 무기를 금지하는 국제조약 가입 현황을 보면 이스라엘이 중동지역의 WMD 안전지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CWC(화학무기 금지조약)는 화학무기의 개발 및 생산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다. 이에 가입한 나라는 화학무기의 파기 및 과거 개발기록을 제출해야 하고 화학물질 생산시설을 국제사회에 개방해 정기·특별 사찰에 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1993년 이 조약에 서명한 상태지만 그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1972년 조인된 생물무기 금지조약에는 서명도 하지 않았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의 가다피 대통령(왼쪽)과 이스라엘과의 조건 없는 평화협상 재개를 요구한 시리아의 바샤르 대통령.
국제조약 가입할까 ‘관심거리’
생물무기는 이스라엘의 방어전략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분야로 평가된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상임연구원이자 ‘이스라엘과 폭탄(Israel and the Bomb)’의 저자인 아브네르 코헨은 하아레츠의 기고문에서 중동지역의 일련의 변화에 대해 “WMD의 전쟁 억제력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스라엘은 ‘선언적인 의미’에 불과한 생물무기를 포기하고 중동지역의 변화 대열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지난해 12월13일 미군에게 생포되고 있는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이집트나 시리아 같은 아랍국가가 자국의 생화학무기를 이스라엘의 생화학무기와 맞바꾸려는 의사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들이 생화학무기를 내놓는 조건은 이스라엘의 핵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생화학무기 금지조약을 비준하더라도 이집트나 시리아가 그 뒤를 따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아레츠를 비롯한 이스라엘 언론들이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선 이유는,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조치가 강제되기 전에 이러한 국제조약들에 가입해 변화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야 앞으로 전개될 중동질서 개편 논의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샤론 내각은 이러한 안팎의 요구에 현재까지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금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에 끌려갈 것이냐, 아니면 주도적으로 변화를 이끌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