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 충남 예산군 보성초등학교에서 열린 서승목 교장의 영결식(왼쪽). 어린 학생들의 눈물이 어지러운 교육 현실을 말해준다. 4월9일 전교조 본부 사무실에서 원영만 위원장(맨 왼쪽)이 서교장 자살과 관련, 전교조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4월4일 충남 예산군 보성초등학교 서승목 교장이 자살한 이후의 교단의 반목과 대립을 지켜보면서 교육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4월13일 밤 KBS 2TV ‘100인 토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는 교육공동체 분열의 현주소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토론 패널로 나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교총,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측 대표들이 양측으로 갈라져 한 치의 양보 없는 설전을 펼쳤다. 교장과 기간제 교사의 갈등으로 촉발한 사건을 놓고 18만 회원의 교총과 9만 조합원의 전교조가 대리전을 치르고, 양쪽을 지지하는 학부모단체들이 외곽에서 맞붙는 형국이었다.
사회자인 정진홍씨는 “민감한 사안이 토론주제가 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날 토론은 마치 축구 한·일전을 치르는 듯 팽팽했다. 배심원 투표는 사회과학적 엄밀성을 담보할 수 없는, 단지 토론을 정리하고 긴장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이것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받아들여 갈등이 증폭됐다”고 말했다.
교단 내 각종 모순 결국 폭발
토론 후 전자투표에서 ‘전교조가 교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정당했다’가 57, ‘과잉대응이다’가 40으로 ‘정당했다’는 쪽이 더 많은 표를 얻자 교총 쪽 배심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앞서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6대 4 정도로 ‘과잉대응’이라고 보는 쪽이 많았고, ‘100인 토론’의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도 8대 2로 나와 배심원 투표결과와는 달랐다는 점을 강조하며 술렁이는 분위기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사회자 표결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토론을 마무리했으나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일부 배심원들이 투표 조작 의혹을 제기, KBS를 고발키로 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갈등을 풀어보고자 마련한 자리가 갈등의 날을 벼려놓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이인규 사무처장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봐야 전교조나 교총이나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한 초등학교 교장의 죽음이 교육계 전반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에 우려를 표시했다. 오랫동안 교육시민운동에 몸담았던 엄기형 박사(전 민주당 정책보좌역)는 “그동안 쌓여온 교육 내적인 모순이 서교장의 죽음을 계기로 외연화, 정치화했다”고 설명한다. “사건 초기 전교조의 개입이 월권이었느냐 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언론이 죽음의 원인을 전교조의 과잉대응으로 몰아갔고, 여기에 교총이 적극 개입하면서 교단 분열이 가속화했다.”
4월14일자 전교조신문 ‘교육희망’은 ‘교장 죽음 등에 업고 보수세력 총공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직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일제히 전교조를 공격하고 나서 정작 교육부 개혁과 학교 자치 실현을 바라는 교육계의 목소리가 움츠러들고 있다”며 보수세력의 ‘전교조 죽이기’를 비난했다. 그러나 교총은 “최근 학교 현장에서는 전교조에게 찍히면 죽는다는 말이 퍼져 있다”며 “전교조가 교장을 권위주의의 표본으로 몰아가고 장외투쟁을 일삼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학생 딸을 둔 이모씨(46·서울 강남구 삼성동)는 “전교조 합법화 이후 교단 갈등이 심화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 일부 사건을 침소봉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론을 보면서 같은 교사라도 소속단체가 다르면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교사들이 반목하는 학교에 자녀를 맡겨도 되는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교육시민단체가 교총과 전교조 갈등을 해결할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엄기형 박사(왼쪽). ‘법대로’의 원칙을 강조하는 채수연 전 교총 사무총장.
교단 균열현상이 가시화된 것은 1998년 교원정년 단축 파동 때부터다. 당시 교총과 전교조는 즉각 반대성명을 냈으나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교장과 원로교사들의 입김이 센 교총은 적극 반대 입장이었으나, 학교개혁을 위해 정년단축이 불가피하다고 본 전교조는 소극적 반대에 머물렀다. 여기에 학교운영위원회 도입, 전교조 합법화 등 일련의 조치들이 더욱 교장들의 입지를 좁혀놓았고, 교총 내부의 불만도 커져갔다. 7년간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명지대 김진성 객원교수는 “한국의 교장은 책임만 있지 권한이 없다”며 교장의 리더십 부재와 영(令)이 서지 않는 학교 현실을 개탄했다.
상대적으로 전교조는 합법화라는 날개를 달고 학교 안팎에서 발언 수위와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에 대해 교총의 황석근 대변인은 “전교조가 합법화 이후 연가투쟁 등 전국적인 불법집회를 한 것이 무려 일곱 차례, 반전평화수업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이 다섯 차례에 달한다”며 전교조의 정치화를 비난했다.
16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교총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됐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제시한 교육공약에는 ‘교사회·학생회·학부모회의 법제화’와 ‘학교장 임용제도의 다양화’가 포함돼 있었다. 교사회 법제화가 곧 의결기구화이며 학교장 임용제도 다양화가 곧 ‘교장 선출 보직제’라고 받아들인 교총은 이로써 전교조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질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공약에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내부적으로는 교원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전교조의 정치활동’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았던 교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까
사실 교총도 전교조 대항 차원에서 2001년 11월 정치활동을 선언했다. 그 후 교총 회장 직속으로 정치활동위원회를 두고 특정 후보의 교원정년 환원 공약을 환영하며 간접 지지를 표명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교총이 일선 교사들을 동원해 학부모들에게 특정 후보 지지를 권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교총은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에 참여했던 교육계 인사는 “대선 패배 후 교총은 교육정책에 대한 의견서 한 번 내지 않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전했다. 반면 전교조는 인수위 구성 단계에서부터 적극 개입했다. 당시 인수위원으로 참여했던 동국대 박부권 교수를 반개혁적 인사로 규정하고, 대신 전교조와 인연이 깊은 한국 해양대 김용일 교수를 지지한 것이 그 예. 그 사이 광주에서 부적절한 인사 문제로 교육감과 교장이 전교조측에 반성문을 써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교조와 교총의 불안한 동거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보성초등교 사건이 터지자 교총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전교조의 개입이 월권이며 과잉대응이었다고 맹공했다. 이를 가리켜 한 지방 초등학교 교장은 구조적으로 누적된 감정의 활화산이 폭발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4월18일로 임기를 마친 교총 채수연 전 사무총장은 “80년대 이후 교단의 상처가 너무 깊다”며 말을 꺼냈다. “교육자는 상처를 입으면 안 된다. 상처는 치유 후에도 흔적을 남기고 더 큰 상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전교조가 합법화까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에 대한 반발로 합법화 후에도 투쟁일변도로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교단의 분열을 치유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법을 지키면 된다. 전교조의 집단연가투쟁이나 학교 내 노조활동은 불법이다. 그것을 엄격히 금하고, 교사는 교사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전교조 정재욱 정책실장은 보성초등교 사건을 교단 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본질 회피라고 말한다. “이번 사건은 학교 내 기간제 교사의 문제며, 여교사의 차 접대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 현장에 대한 문제제기다. 잘못된 관행을 고치자는 것을 교단 갈등과 분열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갈등을 덮어버리고 균열을 봉합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 민주화와 학교 자치를 위해 이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겠다.”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교총과 전교조의 충돌을 막을 중재자는 없는가. 엄기형 박사는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총과 전교조를 중심으로 교육시민단체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해, 시민사회가 이들의 들러리 역할밖에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마당에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까. 승자 없는 싸움에 교단은 분열되고 학생들만 상처를 받고 있는 게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