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들어서 시민 참여가 부쩍 강조되고 있다. 이름부터 ‘참여정부’라고 했고 장관 후보를 인터넷으로 추천받았을 정도로 인터넷 정치에 관심이 높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며, 참여민주주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민 참여가 활성화되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품격이 높아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저급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시민 참여란 ‘양’만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질’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크거나 입심 좋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눌한 다수의 사람들을 기죽이려 하고, 의견과 신념이 다르다고 인터넷으로 인신공격과 욕설까지 퍼부어대면서 참여정치를 말한다면 참여민주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일 뿐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과대·과소 대표 없는 실질적 참여 보장이 성패 좌우
정치 참여는 사적 모임에의 참여와는 달리 중차대한 행위다. 참여를 통하여 공공정책이 결정되고 그 정책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구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참여가 일정한 규범과 원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과두정치나 소수의 횡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 정치 혹은 시민 참여라고 하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할 정도로 방방곡곡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온갖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조직화된 목소리가 조직화되지 않은 목소리를 압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목소리는 소수라도 ‘천둥소리’처럼 천지를 진동하는 데 비해 조직화되지 못한 목소리는 다수라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외로운 목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참여가 그것이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임명되었지만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 몇 번에 걸쳐 일부 시민단체들이 거론된 인사의 개혁성을 문제 삼으며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던 당사자들은 명예를 훼손당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루아침에 반개혁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각종 시민단체들이 공익단체로 자임해왔고 이익단체와는 다른 특권적 위상을 향유하게 되었다. 공익을 목표로 한다는 명분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수정권일수록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정책을 추진하려는 경향마저 보여왔다.
그 경우 대의기구를 우회하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익을 표방하고 개혁을 외친다고 해서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이념이 혼재하며 경합하는 ‘경쟁적 다원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개혁도 그 의미가 일의적이 아니라 사뭇 다의적이고 경합적이다. 도덕성을 높이는 개혁이 있는가 하면 효율성을 높이는 개혁도 있다. 또 시장개혁도 기업규제 강화를 목표로 삼는 개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정부규제 혁파를 대상으로 삼는 개혁도 있다.
이처럼 개혁이 개인이나 집단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시민단체도 개혁성이나 공익을 독점한 ‘철인왕’처럼 굴어서는 곤란하다. 생각해보면 ‘반개혁적’이라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다. 개혁의 방향과 방법론에 대해서 합의가 없었는데, 어떻게 ‘반개혁적’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그 실험의 성공 여부는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시민 참여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참여는 없고 ‘시민단체’의 참여만 있으며, 인터넷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네티즌의 참여’는 없고 ‘인터넷 동호회’의 참여만 있다면 ‘무늬만’ 참여민주주의가 되는 셈이다.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려면 잘 조직화된 몇몇 시민단체나 인터넷 동호회의 의견만이 과대 대표되어서는 곤란하며, 특히 조직화되지 않은 보통 시민들의 작은 목소리가 과소 대표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민 참여가 활성화되었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품격이 높아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저급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시민 참여란 ‘양’만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질’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크거나 입심 좋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눌한 다수의 사람들을 기죽이려 하고, 의견과 신념이 다르다고 인터넷으로 인신공격과 욕설까지 퍼부어대면서 참여정치를 말한다면 참여민주주의의 일그러진 모습일 뿐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과대·과소 대표 없는 실질적 참여 보장이 성패 좌우
정치 참여는 사적 모임에의 참여와는 달리 중차대한 행위다. 참여를 통하여 공공정책이 결정되고 그 정책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구속력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참여가 일정한 규범과 원칙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과두정치나 소수의 횡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인터넷 정치 혹은 시민 참여라고 하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할 정도로 방방곡곡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온갖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조직화된 목소리가 조직화되지 않은 목소리를 압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목소리는 소수라도 ‘천둥소리’처럼 천지를 진동하는 데 비해 조직화되지 못한 목소리는 다수라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외로운 목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참여가 그것이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임명되었지만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 몇 번에 걸쳐 일부 시민단체들이 거론된 인사의 개혁성을 문제 삼으며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유력하게 거론되던 당사자들은 명예를 훼손당하고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루아침에 반개혁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각종 시민단체들이 공익단체로 자임해왔고 이익단체와는 다른 특권적 위상을 향유하게 되었다. 공익을 목표로 한다는 명분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수정권일수록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정책을 추진하려는 경향마저 보여왔다.
그 경우 대의기구를 우회하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익을 표방하고 개혁을 외친다고 해서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가치와 이념이 혼재하며 경합하는 ‘경쟁적 다원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개혁도 그 의미가 일의적이 아니라 사뭇 다의적이고 경합적이다. 도덕성을 높이는 개혁이 있는가 하면 효율성을 높이는 개혁도 있다. 또 시장개혁도 기업규제 강화를 목표로 삼는 개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정부규제 혁파를 대상으로 삼는 개혁도 있다.
이처럼 개혁이 개인이나 집단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시민단체도 개혁성이나 공익을 독점한 ‘철인왕’처럼 굴어서는 곤란하다. 생각해보면 ‘반개혁적’이라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다. 개혁의 방향과 방법론에 대해서 합의가 없었는데, 어떻게 ‘반개혁적’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그 실험의 성공 여부는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형식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시민 참여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참여는 없고 ‘시민단체’의 참여만 있으며, 인터넷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네티즌의 참여’는 없고 ‘인터넷 동호회’의 참여만 있다면 ‘무늬만’ 참여민주주의가 되는 셈이다.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려면 잘 조직화된 몇몇 시민단체나 인터넷 동호회의 의견만이 과대 대표되어서는 곤란하며, 특히 조직화되지 않은 보통 시민들의 작은 목소리가 과소 대표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