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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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오더’가 아직 없다

KBS 등 주요 방송사 사장 선임 이례적 침묵 … 방송 독립 염원 방송계 “오히려 이상”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3-03-13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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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오더’가 아직 없다

    KBS와 MBC, SBS 사옥 전경(왼쪽부터)

    “KBS 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속에 있는가. 그렇다면 노대통령은 즉시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버려라.”

    2003년 3월6일자 KBS 노조 성명서 내용의 일부다. 주요 방송국, 통신사마다 사장 선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조 성명에서도 일부 나타나듯 여권, 방송사, 야당 3자 간 정보전, 힘 겨루기가 전개되고 있어 ‘권력과 방송의 관계가 어떻게 짜여질 것이냐’가 최대 관심사다.

    박권상 KBS 사장은 임기 만료(2003년 5월)를 2개월 앞두고 사임했다. 후임 KBS 사장 인선과 관련, KBS 노조가 먼저 노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다음은 노조 관계자가 전하는 여권, KBS 노조 간 움직임.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여권에선 여러 사람들이 KBS 사장 하마평에 올랐다. 노조 소속 기자들의 취재 결과 대부분 ‘자가발전’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신문사 편집국장 출신으로 대통령선거 당시 노대통령의 언론정책 고문을 역임한 서모씨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L씨 등 노대통령의 측근들이 서씨를 KBS 사장에 내정했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왔다. 그래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방송정책 ‘친노조적 성향’으로 흐를 듯

    ‘청와대 오더’가 아직 없다

    3월9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을 각 방송사들이 일제히 생중계하자 한나라당은 노정권 들어서도 정권과 방송 사이에 밀월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노조측은 “노대통령 측근들과 접촉했는데 노정권이 서씨를 마음에 두고 있으며, 예상보다 세게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KBS 노조가 서씨를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특정 정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목적으로 활동한 인사가 사장이 되면 KBS의 공정성을 의심받게 된다는 것과 KBS 사장을 대통령이 낙하산으로 내려 보내는 관행을 이제는 없애고 원칙대로 KBS 이사회가 실질적으로 사장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KBS 사장은 여권 추천 방송위원이 대다수인 방송위원회(이하 방송위)가 임명하는 이사들로 구성된 KBS 이사회가 임명해왔다. 이 때문에 KBS 사장 낙하산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 다음은 한나라당 고홍길 의원측 설명. “DJ정권에서 장관급인 방송위 위원장은 같은 장관급 부처인 문화관광부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임명장을 전달받기도 했다.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박지원씨였다.”

    그런데 성명서 발표 이후 KBS 노조 한 간부는 기자에게 “노대통령이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씨를 KBS 사장에 임명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어떤 근거에서 이런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일까. 언론노조 한 간부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간부는 노대통령측과 접촉한 뒤 “노대통령은 ‘언론노조와 코드가 안 맞는 사람’을 사장에 앉히지 않는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정설에서 거론된 L씨도 기자에게 “노조가 있는데 특정인을 KBS 사장으로 내정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내정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KBS 사례를 제외하면 노정권이 방송, 통신사 사장 인선을 마음대로 하는 징후는 전혀 없다. 그렇다고 방송 독립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언명도 없다. 그래서 “도대체 노정권의 방송정책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의문이 나오고 있다. 일부 방송사 노조에 따르면 이해성 청와대 홍보수석은 언론사 노조위원장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이를 두고 “청와대의 방송사 인선 불개입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측도 있지만 논란이 분분하다. 통신사인 연합뉴스 사장은 3월20일 물러난다.



    연합뉴스의 대주주는 KBS, MBC 등이어서 연합뉴스 사장도 정권의 의지에 따라 선임될 수 있는 자리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3월7일 현재까지 노대통령의 측근이나 KBS 주변에서 사장후보 명단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노정권은 “사장을 공모제로 선출하자”는 노조의 제의는 비공식 라인을 통해 거부하고 있다.

    3월7일 현재 공석인 YTN 사장 선임권은 대주주인 한국전력이 갖고 있다. 백인호 전 사장은 DJ정권의 핵심 측근에 의해 임명됐다는 것이 노조측 주장이다. 그러나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노대통령측은 YTN 사장 선임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YTN 노조 관계자는 “청와대가 낙점하면 한전이 임명해왔다. 청와대가 침묵하자 한전이 당황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 3월7일까지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는 이긍희 전 대구MBC 사장을 MBC 사장에 선임했다. 이를 두고 ‘방문진의 쿠데타’라는 얘기도 나온다. 방문진은 MBC 내부에서 사장후보 4명을 추천받아 그중 한 명을 임명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외부 입김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임 이사장은 진보계열의 전임 김중배 전 사장과는 성향이 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MBC 전무로 재직하다 김 전 사장에 의해 대구MBC 사장으로 내려갔다.

    언론노조에선 “MBC 사장 후보 4명 중 노조가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이사장과 엄기영 특임이사 두 사람이었다. 노조 의견도 참고한 인선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MBC 노조가 사장 선임 직후 발표한 성명에는 “노조가 사장을 견인해 나가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한나라당에선 편파방송 시정 별러

    MBC 사장 선임 결과와 KBS 신임사장 논란의 전개를 놓고 봤을 때 노정권의 노골적, 직접적 방송 장악 의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신 노정권의 방송정책이 ‘친노조 성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노정권에서 대통령이 방송, 통신사 사장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보도·제작 방향을 통제하는 일이 있을 것인지 여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편파방송을 대선 패배의 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방송중립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의 타깃은 방송위 위원 구성비율 변경에 맞춰져 있다. 현재 7대 2로 되어 있는 여권 추천 대 야당 추천 방송위원 비율을 5대 4로 조정하겠다는 것이 한나라당 안이다. 현 방송위에선 여권 추천 위원이 의결정족수인 재적위원 3분의 2를 넘어 야당 추천 위원의 출석 없이도 단독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의 방송사 장악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선 여권 추천 위원만으로 의결정족수가 채워지도록 해선 안 된다는 것이 한나라당 주장이다. 한나라당측은 “이 부분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선 당시 방송뉴스의 편파성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온 양휘부 전 이회창 후보 언론특보가 한나라당 몫의 방송위 위원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한나라당은 또 MBC의 피감 대상 지정 문제도 다시 논의하고 KBS 사장 임명시 국회동의를 입법화할 계획이다.

    그러나 한나라당도 무작정 강공책을 밀고 나갈 수만은 없는 처지다. 한나라당은 방송문제에서만큼은 입법권한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이하 문광위)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지만 법안상정권을 가진 문광위 위원장은 배기선 민주당 의원이 맡고 있다. 한나라당 마음대로 법을 개정할 수 없는 데다 여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방송위 위원 선임이 계속 늦춰질 경우 임기가 종료되었더라도 현 방송위 위원들이 KBS 이사회 구성 등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지난해 문광위원장 자리를 민주당에게 내준 것은 방송의 중요성을 간과한 당 지도부의 실책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도 “새 정부 출범 후 자리 배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언제까지 방송위원장, 방송위원 임명을 늦출 것이냐”는 내부의 압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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