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장에서 홍화씨를 심고 있는 돓씨학회(cafe.daum.net/ dolssi) 회원들. 가운데가 반재원 회장. 시밀론에 밀려 사라져가는 토종목화(오른쪽).
“홍화씨에 신비한 약효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현재 엄청난 양의 수입산 홍화씨와 일부 저질의 토종 홍화씨가 시중에 쏟아져 나와 있어요. 그러나 홍화씨라고 해서 다 같은 효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만산 홍화씨를 10근 정도 먹어야 겨우 우리 토종 홍화씨 1근 정도 먹은 효능을 낼까 말까예요. 즉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냐에 따라 홍화씨의 품질이 천차만별이지요.”
또 수입산 홍화씨는 우리 땅에서 적어도 6년 이상 재배한 것이라야 토종의 40% 정도 효과를 낼 수 있으며, 10년 넘게 재배해야만 토종의 60∼70%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18년 이상 이 땅에서 자라야 진짜 토종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돓씨학회 회원들의 주장이다.
외국 반출 토종식물 260여종
이들이 돓씨학회 실습장에 심고 있는 홍화씨가 바로 그 18년산 종자라고 한다. 워낙 귀한 종자다 보니 땅도 아무 곳이나 고른 게 아니라, 북악산 자락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길지(吉地)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회원들은 하얀색을 띤 종자 하나하나를 자식 어루만지듯 정성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18년산 홍화 종자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존케 된 것은 전적으로 돓씨학회 회장 반재원씨(창덕여중 교사)의 공. ‘훈민정음 기원론’ ‘한글과 천문’ 등 한글 연구 저서를 발간해 한글운동가로 잘 알려진 반씨는 정작 월급의 대부분을 토종약초를 구하고 재배하는 데 써버릴 정도로 토종약초 보존에 열정을 기울여온 인물이다.
반회장이 토종 홍화씨를 복원해낸 데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숨어 있다. 1945년 광복 후 광물성 물감의 보급으로 인해 홍화가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에서 반회장은 90년대 초반부터 토종 홍화씨를 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헤맸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 서울 경동시장의 한 약재업자로부터 우리 땅에 심은 지 5∼6년이 되었다는 대만 원산 홍화씨를 건네받았다. 몇 달치 월급을 다 털어 구입한 것이었다. 허구한 날 빈 월급봉투만 들고 오고 퇴근 후나 주말이면 종자를 심어놓은 화분만 끌어안고 있는 그에게 가족들은 “그 10분의 1만이라도 가족에게 쏟아보라”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에 감복해 부인 허정윤씨도 결국 돓씨학회 열성 회원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홍화씨는 이제 최고의 상품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돈을 벌려고 토종약초 보존사업을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수익을 내본 게 그때 홍화씨를 재배한 것이었어요. 많을 때는 2000평까지 지은 적도 있지요. 홍화씨의 약효는 저도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눈길에 미끄러져 갈빗대가 부러졌는데 홍화씨를 먹고 바로 나았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뼈가 부러졌을 때 홍화씨를 복용해보면 뼈의 어디가 부러졌는지 저절로 표시가 납니다. 다친 부위 중에서도 유독 집중적으로 따끈따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만큼 홍화씨의 약효가 큰 거지요.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 토종약초 대부분이 이렇게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어요.”
① 화상에 특효가 있는 오이, 고혈압에 잘 듣는 자주감자, 감칠맛이 뛰어난 찰옥수수 등 토종식품들.<br>② 비타민 C가 풍부한 토종고추.<br>③ 간질환에 뛰어난 효과가 있는 토종 노나무.
“화상에 오이가 효험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금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다수확품종 미국 오이는 별 효과가 없어요. 반면 토종오이 한 개를 먹으면 개량종 오이 30개 이상 먹은 것보다 더 큰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지요. 또 우리나라에서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토종고추에는 비타민 C가 사과의 18배나 들어 있어서 토종풋고추 3개만 먹으면 비타민 C 하루 권장량이 충족될 정도에요. 이렇게 토종고추가 비타민 C의 보고이기 때문에 민간요법에서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의 개량종 고추로는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없어요.”
오랫동안 병을 앓아오다 보니 한약에도 이력이 난 이도경씨는 요즘 유통되는 한약재에도 불만이 많다고 했다. 요즘 한약이 예전에 비해 양을 많이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효과는 오히려 떨어지는 것이 중국산 수입 약재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토종약초에는 굴욕을 겪어온 한민족만큼이나 뼈아픈 과거사가 묻어 있다.
“우리 토종 앉은뱅이밀을 가져간 미국의 보록 박사는 품질개량으로 신종 밀 재배에 성공해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사료용으로 위장해 은행잎을 수입해간 독일의 제약회사는 혈액순환제를 개발해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년필 몽블랑은 한국산 옻진이 안 들어가면 제품이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토종식물이 외국으로 반출된 건이 무려 260여건에 달합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구상나무를 비롯해 라일락, 카네이션, 흰백합 등이 모두 우리 토종식물을 개량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토종식물이야말로 단순히 우리 것이 우리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의 차원을 넘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주력 산업의 하나로 성장할 수도 있을 거예요. 말하자면 토종은 우리나라의 보물이지요.” 반회장의 말이다.
‘한국 특산물’로 지정 육성해야
④ 알콜 해독에 특효약인 호깨나무.<br>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돓씨홍화.
이 책에서는 골절과 골다공증엔 홍화씨, 숙취엔 토종오이와 호깨나무, 초기암엔 마늘, 노이로제엔 다슬기와 흰오골계란, 변비와 당뇨엔 삼백초, 정력 보강엔 삼지구엽초, 신경통엔 흰봉숭아가 좋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 재배법도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이들 약초만 집중적으로 상품화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식물 강국으로 부상해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돓씨학회 회원들은 부암동의 실습장 외에 경북 청도에 있는 ‘돓씨농장’에서 토종작물들을 천연기념물을 보살피듯이 키우고 있다. 농장에선 도를 통하고 장수한다는 도통이나무에서부터 모감주나무, 오가피, 노나무, 세신, 석창포 등 약 50종의 토종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최소한 멸종만은 면하게 하려고 회원들이 번식 종자용으로 조금씩 키우는 것들이라고 한다. 이곳의 씨앗 하나가 없어져 버리면 이 땅에서 토종식물 하나가 자취를 감춰버릴 정도로 귀중한 자산들인 셈.
여기서 끝내 풀지 못한 의문 하나는 왜 우리나라의 토종식물은 다른 나라의 식물에 비해 뛰어난 약효가 있다고 하는 걸까였다. 이에 대해 반회장은 우리나라 토질이 특수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우리나라는 매일 자정이면 백두산 천지의 영향을 받아 어김없이 전국의 지하수나 샘물에 0.01∼10% 가량의 감로정(甘露精) 기운이 솟아나옵니다. 이런 감로수가 우리나라 전역의 지하 수맥으로 흘러 땅을 적셔주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는 약초의 약효를 외국에서 쉽사리 흉내낼 수 없지요. 게다가 이 땅의 식물들은 우리 몸에만 맞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똑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세계적인 상품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회장은 부암동 실습장을 떠나는 기자에게 “민간 약초 하면 꺼림칙하여 먹지 않는 통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 임상효과가 있는 약초에 대해서는 보건당국 차원에서 왜 효과가 있는지 연구 검토하고 한국 특산물로 지정해 세계시장에 도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