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애당초 없다. 자연의 법칙이나 현상으로 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기적이니까. 기적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적적’인 것은 있어도 ‘기적’은 없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현실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예술이 있다. 그 원천은 직관력과 상상력이다. 직관력은 판단과 추리에 기대지 않은 채 대상을 향해 일초직입(一超直入)하고, 상상력은 아무런 인과관계도 성립되지 않는 현상을 보여주면서 다중의 동의를 얻어내는 힘이다.
‘가능의 예술’은 어린아이에게 흔하다. 머리에 굳은살이 박히고 가슴에 각질이 생긴 어른에게 가능의 예술은 희귀품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드문 것이다. 나는 최근 신문에서 어린아이가 펼치는 가능의 예술을 보고 무릎을 쳤다.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미국 어린이들의 답안지를 소개한 글이었다. 문제는 과학 과목에서 제출됐다. 그 꼬마들의 답안지가 예술이다. 맛보기 삼아 몇 개를 선보이겠다.
먼저, 이슬이란? 그들의 답은 ‘풀잎이 흘린 땀’이다. 다음은 버섯을 설명하는 대목. ‘그것은 축축한 곳에서만 산다. 그래서 모두 우산처럼 생겼다.’ 세상에, 누가 이것을 틀린 답이라고 말하는가. 그런 이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을 틀렸다고 우기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의 답은 정답이 아니지만 오답도 아니다. 한마디로 시의 경지다. 그들은 곧잘 과학을 예술로 바꾸는 능력을 보여준다.
셈법 따라 왔다갔다…정치인에게 불가능은 없다?
걸작은 ‘밀물과 썰물’에서 나왔다. ‘밀물과 썰물은 물이 없는 달이 지구의 물을 뺏으려 하고, 지구는 뺏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 싸움에 태양은 끼어들지 않는다. 물을 가져가봐야 너무 뜨거워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게 웃으면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고 뭘까. 또 있다. 인공수정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기발한 답이 나왔다. ‘암소가 수소 몰래 농부와 바람피우는 것.’
이 아이들은 개그나 재치 문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아이들의 속을 결코 헤아리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가능의 예술가다. 아이들의 ‘현답’은 과학 문제에서 나왔다. 과학은 가능성을 묻고 예측하는 학문이다. 그 속에서 보편적 진리와 법칙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표현한다. 풀잎은 땀을 흘리지 않고, 암소는 농부와 바람피울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영역은 아이에게는 기적이 아니고 예술이다. 불가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사회에 가능의 예술을 외치는 무리가 아이들 말고 하나 더 있다. 그들은 정치인이다. 사실 가능의 예술이란 말도 정치인이 처음 쓴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세상을 뜬 한 노회한 정치인이 내뱉기를 “정치란 가능의 예술이다”고 했다. 그 정치인은 실로 기막힌 명제를 던진 것이다. 순수한 의미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 맞다. 다만 예술보다는 기술에 치우칠 때, 그 명제는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다. 기술에 담긴 공업적 개념은 흔히 공작적 시도에 의해 왜곡되기 쉽고, 또한 불가한 사유(事由)를 가한 당위로 보이게끔 만드는 데 공작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다.
가능의 예술이 정치의 장에서는 흔히 ‘안 될 게 뭐 있냐’는 식의 마구잡이로 흐른다. 마구잡이가 예술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안다. 그 단적인 예를 나는 ‘철새 정치인’에게서 발견한다. 전도가 창창한 젊은 정치인이 몸담았던 당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잠시 헤어져 크게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동쪽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가는 사람을 보고 “하나가 되자”고 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약속했으니 예술이란 말인가. 천만에, 풀잎이 땀을 흘리는 데는 이해(利害)관계가 없지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셈을 따진 것이다. 이게 예술이라면 아이가 웃는다.
하루아침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옮긴 또 한 정치인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를 이유로 들이댄다. 역사는 당대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가능의 예술을 오독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예술 아닌가. 거스를 수 없는 것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은 예술은커녕 기술에도 못 미친다. 그저 안가(安價)한 태도일 뿐이다.
하기야 철새는 따뜻한 곳만 찾는다. 서울대 최재천 교수는 ‘철새’라는 말도 쓰지 말라며 화낸다. 머리와 가슴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단물을 찾아 기생하니 ‘진드기 정치인’이라는 용어가 맞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답게 그는 철새를 욕보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나도 덧붙이고 싶다. ‘가능의 예술’에서 ‘가능’을 좇는 것은 좋으나 ‘예술’은 그만 좀 욕보이라고.
‘가능의 예술’은 어린아이에게 흔하다. 머리에 굳은살이 박히고 가슴에 각질이 생긴 어른에게 가능의 예술은 희귀품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드문 것이다. 나는 최근 신문에서 어린아이가 펼치는 가능의 예술을 보고 무릎을 쳤다.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미국 어린이들의 답안지를 소개한 글이었다. 문제는 과학 과목에서 제출됐다. 그 꼬마들의 답안지가 예술이다. 맛보기 삼아 몇 개를 선보이겠다.
먼저, 이슬이란? 그들의 답은 ‘풀잎이 흘린 땀’이다. 다음은 버섯을 설명하는 대목. ‘그것은 축축한 곳에서만 산다. 그래서 모두 우산처럼 생겼다.’ 세상에, 누가 이것을 틀린 답이라고 말하는가. 그런 이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을 틀렸다고 우기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의 답은 정답이 아니지만 오답도 아니다. 한마디로 시의 경지다. 그들은 곧잘 과학을 예술로 바꾸는 능력을 보여준다.
셈법 따라 왔다갔다…정치인에게 불가능은 없다?
걸작은 ‘밀물과 썰물’에서 나왔다. ‘밀물과 썰물은 물이 없는 달이 지구의 물을 뺏으려 하고, 지구는 뺏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어난다. 이 싸움에 태양은 끼어들지 않는다. 물을 가져가봐야 너무 뜨거워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게 웃으면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고 뭘까. 또 있다. 인공수정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기발한 답이 나왔다. ‘암소가 수소 몰래 농부와 바람피우는 것.’
이 아이들은 개그나 재치 문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아이들의 속을 결코 헤아리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가능의 예술가다. 아이들의 ‘현답’은 과학 문제에서 나왔다. 과학은 가능성을 묻고 예측하는 학문이다. 그 속에서 보편적 진리와 법칙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표현한다. 풀잎은 땀을 흘리지 않고, 암소는 농부와 바람피울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한 영역은 아이에게는 기적이 아니고 예술이다. 불가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사회에 가능의 예술을 외치는 무리가 아이들 말고 하나 더 있다. 그들은 정치인이다. 사실 가능의 예술이란 말도 정치인이 처음 쓴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지금은 세상을 뜬 한 노회한 정치인이 내뱉기를 “정치란 가능의 예술이다”고 했다. 그 정치인은 실로 기막힌 명제를 던진 것이다. 순수한 의미의 정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 맞다. 다만 예술보다는 기술에 치우칠 때, 그 명제는 음습한 기운을 내뿜는다. 기술에 담긴 공업적 개념은 흔히 공작적 시도에 의해 왜곡되기 쉽고, 또한 불가한 사유(事由)를 가한 당위로 보이게끔 만드는 데 공작만큼 효율적인 것도 없다.
가능의 예술이 정치의 장에서는 흔히 ‘안 될 게 뭐 있냐’는 식의 마구잡이로 흐른다. 마구잡이가 예술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안다. 그 단적인 예를 나는 ‘철새 정치인’에게서 발견한다. 전도가 창창한 젊은 정치인이 몸담았던 당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잠시 헤어져 크게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동쪽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가는 사람을 보고 “하나가 되자”고 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약속했으니 예술이란 말인가. 천만에, 풀잎이 땀을 흘리는 데는 이해(利害)관계가 없지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셈을 따진 것이다. 이게 예술이라면 아이가 웃는다.
하루아침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옮긴 또 한 정치인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를 이유로 들이댄다. 역사는 당대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가능의 예술을 오독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 예술 아닌가. 거스를 수 없는 것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은 예술은커녕 기술에도 못 미친다. 그저 안가(安價)한 태도일 뿐이다.
하기야 철새는 따뜻한 곳만 찾는다. 서울대 최재천 교수는 ‘철새’라는 말도 쓰지 말라며 화낸다. 머리와 가슴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단물을 찾아 기생하니 ‘진드기 정치인’이라는 용어가 맞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답게 그는 철새를 욕보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나도 덧붙이고 싶다. ‘가능의 예술’에서 ‘가능’을 좇는 것은 좋으나 ‘예술’은 그만 좀 욕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