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그러니까 철새라고 욕을 먹지.”
통화 도중 기자를 맞은 A씨는 여의도를 강타한 기류 변화에 민감한 의원들의 ‘철새’ 행태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백이·숙제의 길은 쉽다고, 그렇지만 혼자만 고고하면 나라와 국민은 어쩌느냐고 그러더라. 그러던 사람들이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니….”
운명의 10월 말이다. 민주당 내 반노(反盧) 그룹 지도부가 최종 탈당 시점으로 정한 D-데이다. 후단협 회장인 최명헌 의원은 “이번 주중 탈당을 추진한다”고 결단을 예고한다. 최의원은 당 지도부에 전국구 의원들의 출당을 요구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강경파 이윤수 의원도 “10명이든 15명이든 탈당을 단행할 생각이다”며 ‘무조건 탈당’ 의지를 확인한다. 이희규 의원도 비슷한 입장. 빼든 칼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자칫 천막 당사 신세 된다” 민주당 잔류 선언도
민주당대통령후보단일화 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이 10월21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만나 향후 진로 등을 논의했다.
“10년 전 대선에서 실패한 정의원의 선친 정주영 전 국민당 대표는 93년 초 홀연히 정계를 떠났고, 그를 따랐던 국민당 소속 의원들은 졸지에 천막 당사 신세로 전락했다.”
탈당했다가 자칫 정치적 고아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불만은 현실 안주로 이어진다. 전국구인 장태완 의원은 아예 후단협에서 발을 뺐다. 김원길 의원은 4자연대 무산 이후 후단협과도 접촉을 피하고 있다. 벌써 10여일째다. 탈당계를 제출한 강성구 의원의 반응은 더욱 시니컬하다. “흥미를 잃었다”는 그는 후단협 인사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다. 11월 초까지 지켜보겠다는 조건부 탈당론으로 돌아선 인사도 적지 않다. 후단협 내 강경파 L의원은 “탈당을 부추긴 인사들이 알고 보니 탈당계를 쓰지 않았더라”며 칼을 거꾸로 잡을 기세다. 김영배 의원과, 반노에 앞장선 S, L의원 등을 지칭한 말이다.
새 둥지를 찾고자 결의했던 경기도 출신 의원 9명의 처지도 비슷하다. 남궁석 박병윤 의원은 이미 당 잔류를 선언했고 나머지 인사들도 곡예비행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동교동계도 쌌던 보따리를 풀고 다시 계산기를 두드린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후단협 등을 통한 단체행동은 이미 물 건너 갔다”는 후단협 무용론이 나온 지 오래다.
딱한 것은 국민통합21이다. 통합21은 11월5일 창당을 선언한 만큼 갈 길이 바쁘다. 그러나 원내 인사가 없다. 합류했던 안동선 의원은 “(현역 의원을) 동네 강아지 보듯 한다”는 험한 말을 던지고 발걸음을 끊었다. 원내 중심 정당이라는 구호가 무색하다. 신당 주변에서는 후단협이 다음 총선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자민련-이한동-후단협을 묶는 중부권 신당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에 주목한다. 후단협이 이동 경로를 이렇게 바꿀 경우 통합21은 원내세력 규합 실패와 지지율 답보라는 악순환에 시달리게 된다. 통합21의 한 관계자는 “늦었지만 모든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월적 지위를 활용, 선별 영입하겠다는 고자세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통합21측은 창당대회까지 최소 5~6명, 많게는 10여명의 의원을 영입할 계획이다. 그래야 체면이 서고 정풍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998년 9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의원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규탄대회에 나선 한나라당 의원들. 맨 오른쪽 사진이 최근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완구 의원이다.
흡인력은 한나라당이 강해 보인다. 한나라당은 대선투표일(12월19일) 직전까지 ‘철새’들의 곡예비행이 계속될 것으로 확신한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선을 치르기 어려운 사람들의 속사정까지 파악해놓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이미 “과거사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철새들에게 결행 명분을 던져놓았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당이 접촉중인 민주당과 자민련 인사가 최소 10명에서 최고 15명 전후라고 말한다. 민주당의 수도권 충청 강원지역 의원 8∼10명, 자민련의 충청지역 의원 5~6명이다. 자민련 인사들은 김종필 총재(JP)에게 한나라당과의 연대 카드가 최선책임을 수시로 진언한다. JP도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다만 이후보를 지지했다가 대선 이후 ‘팽(烹)’당하는 상황을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자민련 한 인사는 “우리가 모실 테니 따라오라”며 JP를 자극했다. 평소 같으면 대로할 일이지만 JP는 묵묵히 이를 견디고 있다.
민주당 내 이인제 의원과 가까운 반노 성향의 의원들 가운데에도 한나라당 인사들의 구애를 받은 경우가 많다. 친정이 한나라당인 인사, 민주당에서 더 이상의 정치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인사 등이 타깃이다. 전용학 의원이 입당 1호를 기록했지만 경기의 L의원, 충청권의 초선의원 2~3명이 당초 영입 0순위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한나라당이 접촉한 여권 인사가 20여명을 넘는다는 후문이다. 그 속에는 깜짝 놀랄 만한 중진도 있다고 한다. 이후보 진영은 그들에게 경지 정리를 끝낸 비옥한 ‘토지’ 분양을 약속했다. 2004년 총선을 준비하는 정치인들로서는 거절하기 힘든 당근이다. 개간지를 불하받아 모험을 해야 하는 통합21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한나라당은 본격 대선전이 펼쳐지기 전 143명의 현역 의원이 160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비난은 순간이지만 남쪽나라의 따뜻한 온기는 최소 수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설렁탕을 얻어먹지 못한 사람, 아직도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은 노정객 등 먹이를 찾아 곡예비행을 나설 인사들은 이미 줄을 선 상태다. 철새 정치인들은 정의원과 노후보의 지지율을 유심히 본다. 이들의 지지율에 따라 철새들의 이동 경로와 폭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정의원의 지지도가 다시 상승할 경우 ‘통합21’은 철새 도래지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노풍이 재점화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후단협은 당 잔류파와 이탈파로 와해될 수밖에 없다. 현재 후단협 소속 10여명 안팎의 강경파 의원들은 선(先)탈당을 감행할 계획이다. 먼저 나가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복안이다. 그후 정의원이든 이한동 의원이든 파트너를 결정하겠다는 계산이다. 호흡조절에 나선 나머지 인사들은 그들의 탈당이 몰고 올 파장과 후유증을 면밀히 관찰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 거취는 이를 보고 나서 결정할 예정이다. 철새 정치인들이 찾아갈 보금자리는 어딜까. 그러나 철새 정치인들이 그들을 뽑아준 국민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그들의 고민과 관계없이 초라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