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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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중독’ 변절 밥 먹듯

개인 이익 우선 비난 쏟아져도 당적 변경… 정치 신의 짓밟은 철새 단죄 유권자의 몫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2-10-31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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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중독’ 변절 밥 먹듯

    최근 한나라당에 입당한 전용학, 이완구, 한승수, 함석재 의원(왼쪽부터). 창당 전문가로 알려진 민주당 김영배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최근 반노세력 결집에 나섰다. 장재식 의원(맨 오른쪽)은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임대되면서 산업자원부 장관이 됐다.

    당적을 옮길 때 정치인이 내세우는 명분은 대개 ‘민심’과 ‘애국심’ 두 가지다. 민주당 전용학 의원은 한나라당행을 선택하면서 “지역구 유권자들이 한나라당 입당을 원했다”고 말했다. 그 바로 직전에 한나라당에 들어간 무소속 한승수 의원은 “국가의 자존심과 격조를 높이고 민족 역량을 결집해,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일조하기 위해서”라고 입당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민심이나 애국심만큼 추상적인 개념도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증명 불가능한 수사적 표현이다. 그래서 탈당과 입당의 실제 목적은 항상 다른 데 있다는 게 정치권의 정설이다. 지금까지 많은 정치인이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철새형 당적 변경을 단행했다. 현 대선정국에서도 많은 ‘예비철새’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당적 변경의 배후엔 비난을 감수하기에 충분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이익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현실적 이익은 대개 차기공천 약속이나 장관직 등의 자리 보장, 금전적 보상, 사법적 특혜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한승수 의원의 경우, 노태우 정부 때 민정당 국회의원, 상공부장관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에선 대통령비서실장, 신한국당 국회의원, 경제부총리를 맡았다. 한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 강원 춘천에서 민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현 김대중 정부에서 공동여당의 일원으로 외교통상부장관, 유엔총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민국당 탈당, 무소속을 거쳐 결국 원고향이었던 한나라당에 복귀했다.

    한의원은 여야를 넘나드는 줄타기 덕분으로 장관 자리와 유엔의장 자리 등을 ‘전리품’으로 얻은 셈이다. 한의원은 한나라당 입당 직후 한나라당 춘천지구당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검증된 능력을 갖춘 행정가는 정권의 성격에 관계없이 중용되기도 한다”며 임명 배경을 설명했다.

    15대 국회 85명 107차례 당적 바꿔



    충남 천안 출신 전용학 의원은 정치입문 과정에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자민련 국회의원후보 공천을 받지 못하자 민주당행을 택해 공천을 받았다. 민주당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를 공격하는 선봉장인 대변인을 맡기도 했던 전의원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리자 한나라당 입당을 선택했다. 그는 한나라당 내 충청권 실세인 김용환 의원과 상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입당 직후 한나라당이 비워두고 있던 충남 천안갑 지구당위원장직을 맡았다. 한때 한나라당에선 “현역 의원 영입이 불발로 그칠 경우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 없으니 지역 유력인사인 A씨를 앉혀야 한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만약 2004년 총선에서 전의원이 민주당 간판으로 한나라당 후보가 된 A씨와 겨루게 됐다면 무척 힘겨운 싸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재 의원은 민자당-자민련-한나라당의 궤적을 그렸다. 자민련에선 사무총장, 자민련 몫의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한나라당에 들어와서는 한나라당 몫의 법사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숱한 변신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상임위원장 투표에서 최소득표 당선자가 됐다. 민주당 장재식 의원은 2000년 초 자민련으로 임대되어 갈 때 다른 세 명의 임대 의원들과는 달리 장관자리를 보장받아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모 의원은 지구당을 물려받지 못했다. 대신 광역단체장 공천을 내락받았고, 각서도 주고받았다는 소문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해당 의원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이다.



    현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한나라당에선 44명의 현역 의원이 탈당해 민주당, 자민련 등 여권행을 택했다. 이들 의원들 중 상당수는 옮긴 당에서 공천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측은 “여권이 이들 중 일부의 비리 혐의를 포착, 탈당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김영배 의원은 자타공인 창당 전문가다.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때 준비위원장을 맡으며 산파 역할을 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도 사회를 맡아 ‘노풍’과 ‘민주당 리모델링’ 등을 주도했다. 그러나 김의원은 최근 민주당 경선 과정의 치부를 폭로하겠다며 ‘자기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노 진영을 하나의 정치적 결사체로 묶는 일을 자임하는 것. “이 당 만들었다가 안 되면 저 당 만드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 때문에 김의원의 행보에는 개인적 뒷계산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에 현역 의원 입당이 주춤해진 현상을 돈 문제로 풀이하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한 정치권 인사는 “고 정주영 회장이 1992년 국민당을 창당해 대선에 뛰어들 당시에는 현역 의원들 사이에 돈이 풍족하게 돌았다. 정의원이 돈 안 쓰는 선거 한다니까 오히려 세가 안 모이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은 10월22일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창원 주남저수지 부근 축제행사 때 폭죽을 너무 많이 터뜨리면 철새가 놀라 서식에 지장을 받는다”며 폭죽행사 철회를 요구했다. 대다수 ‘철새 정치인’도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당적 변경은 정치인으로선 유권자들에게 적극 알려야 할 대단한 결단이지만, 오히려 이들은 매스컴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당적 변경시에 이면계약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비밀에 부쳐진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유권자와의 약속과 정치적 신의를 어긴 철새 정치인으로 단정할 물증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당적 변경에서 명분과 소신을 읽을 수 있는 일부 정치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당적 변경 전후의 정황을 본 뒤 유권자들이 평가하면 되는 일이다.

    15대 국회에서 모두 85명의 의원이 107차례 당적을 바꿨다. 신당 창당, 당명 변경 등 형식적 당적 변경을 제외한 수치다. 유권자들은 이들의 행태를 잊지 않았다. 한나라당에서 여권으로 옮긴 44명의 의원 중 9명만이 의원 연임에 성공했다.

    최근 당적을 옮긴 한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때리더라도 살살 때려달라”고 말했다. 살살 때려도 소리는 나게 마련이고 유권자는 이를 결코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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