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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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할 날 없는 국정원, 변해야 산다

도청설 시비, 정치권 줄 대기, X-파일 유출 또 도마에 … 정권 말기 정보기관 이용 정치권 자제도 시급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2-10-31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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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할 날 없는 국정원,  변해야 산다
    ”아무리 정보기관 직원들이라고 하지만 위에서 직원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된단 말이냐.”

    최근 도청설 등으로 국가정보원(원장 신건)에 대한 외부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이 지휘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기본권도 없느냐”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감찰실이 최근 직원들을 대상으로 보안감찰을 실시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국정원은 올 들어 “국정원 정보가 야당인 한나라당에 흘러가고 있다”는 지적을 받자 직원들의 출퇴근시 차 트렁크를 검색하는 등 보안감찰을 심심찮게 실시해왔다. 특히 최근 감찰 조사는 그동안 실시된 것 중에서도 가장 강도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 지부와 서울 본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원들의 서랍까지 샅샅이 뒤졌을 정도. 이 때문에 일부 직원들은 “영장 없이 압수수색을 해도 되느냐”고 반발하기도 했다는 것.

    이런 상황 때문인지 국정원 직원들은 너나없이 “대통령선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국정원이 대선을 앞두고 정쟁 대상이 됨으로써 ‘내부적으로’ 괴로운 데다 정쟁 과정에 일부 치부마저 드러나 국정원 조직 자체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정원은 지난해 말 김은성 전 차장이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로 구속됐을 때 “국정원이 비리 조직이냐”는 빈정거림을 들었다.

    그러나 국정원 감찰팀의 조사는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직원들은 “과거 유력 대선후보에 대한 줄 대기 차원의 정보 유출은 모두 국정원 고위 간부들이 저지른 일이었는데, 애꿎은 직원들만 괴롭히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한 관계자는 “직원들은 자기 업무 외에는 관심도 없는 데다 보안장치 때문에 컴퓨터로 출력 작업도 할 수 없어 직원들 차원에서의 ‘문건’ 유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들 “대통령선거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성할 날 없는 국정원,  변해야 산다

    정권 말기 정보기관의 정치권 줄 대기는 고질인가. 98년 취임 이후 국정원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위쪽 사진 오른쪽). 신건 국정원장(아래쪽 사진 왼쪽)이 10월24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최근 국정원 도청자료를 공개한 정형근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직원들의 이런 항변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얘기다. 최근 실시된 대통령선거만 봐도 알 수 있다. 1997년 대선 때 줄곧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던 DJ(김대중 대통령) 캠프는 안기부 고위 간부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안기부의 ‘북풍공작’ 등 DJ 당선 저지 공작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최근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당시 안기부 정보를 DJ 캠프에 제공한 안기부 고위 간부가 Y씨라고 공개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Y씨는 DJ가 당선된 후 당시 고성진 실장에게 자신이 관할하지 않던 103실(대공수사실) 업무에 대해서도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등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연임을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는 것. 그러나 Y씨는 대선 기간중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이용한 ‘대선 공작’에 간여한 사실 때문에 오히려 ‘살생부’에 올라 연임에 성공하지 못했다. ‘양다리 걸치기’를 했던 셈이다.

    국정원 간부들은 정치적 ‘변신’에도 뛰어나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 ‘북풍공작’ 혐의로 구속된 Y실장은 다른 혐의자와 달리 막판에야 구속이 결정됐다. ‘정보맨’으로서 닦은 폭넓은 인맥을 활용, DJ 당선 직후부터 DJ의 측근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역시 ‘북풍공작’ 혐의로 구속된 L실장도 자신의 구명을 위해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던 권노갑 민주당 전 고문을 찾아가기도 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는 국정원 정보가 한나라당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정형근 의원이 있다. 정형근 의원 주변에서 “요즘 정의원은 ‘국사모’ 회원들을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다. ‘국사모’란 현 정권 출범 직후 구조조정으로 국정원을 떠난 전직 직원들의 모임. 굳이 이들을 만나지 않더라도 정보를 들고 찾아오는 국정원 현직 간부들이 많다는 얘기다.

    국정원 도청설도 정형근 의원이 촉발시켰다. 정의원은 10월22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과 대검찰청 이귀남 범죄정보기획관이 10월10일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근영 위원장이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4000억원 지원과 관련한 계좌 추적을 자제해달라’고 주문한 사실을 국정원 도청자료를 통해 확인했다”고 폭로했다.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과 요시다 다케시 신일본산업 사장 간 통화, 박실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 간 통화 등을 도청한 자료를 확보했다고 주장한 이후 세 번째 폭로다.

    성할 날 없는 국정원,  변해야 산다

    국내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 이수일 2차장(오른쪽)이 지난해 12월3일 국회정보위에 출석해 김덕규 정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주당 김옥두 의원에게 인사하고 있다.

    정의원의 이번 폭로는 상당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이근영 위원장과 이귀남 기획관이 모두 전화통화 사실만은 시인했기 때문. 국정원이 “불법적인 도청은 일절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정보위 차원의 무제한 감사를 받을 수 있다”고 강력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정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정원은 청와대, 여당을 비롯해 정부 고위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도청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를 도청한 자료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의 도·감청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주시 대상이 되는 부서는 8국 과학보안국. 그러나 국정원은 10월 초 8국을 해체했다. 신건 국정원장도 10월25일 국회정보위원장실에서 기자들에게 “8국 해체는 오해 소지가 있는 주무 부서를 없애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으로, 간첩 적발이나 방첩 업무를 위한 합법적인 감청은 주무 부서에서 실질적으로 하도록 떼어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정원 관계자들의 얘기는 신원장의 설명과 조금 다르다. 한 관계자는 “8국을 해체해 일부 설비와 인력을 2국(대공수사국)에 넘겨주고, 8국의 나머지 인력·시설과 6국(외사방첩국)의 일부 인력 등을 합쳐 12국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는 방첩 업무 강화 차원으로 해석된다. 세계 어느 나라든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국제전화는 감청하는 게 관례다.

    8국 해체가 국정원의 도청 의혹 해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법 도청 금지에 관한 원장의 강력한 지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지켜진다고 보증할 수 없는 게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신원장 측근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 안기부 시절 청와대 전화까지 도청한 사실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상자기사 참조).

    더욱이 과거 8국은 국정원 내에서 ‘특수한’ 조직이었다. 국정원 간부들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올 3월 김철환 부국장(2급)이 인천국제공항공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후임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8국답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모 대공정책실장이 대공정책실의 선임 과장(3급)을 승진시켜 8국으로 옮겨 앉게 하려 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8국 자체적으로 승진 인사를 단행한 후 이를 관철시켰던 것.

    그렇다면 국정원은 현 정부 들어서도 청와대를 도청했을까. 청와대 쪽에서는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과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씨를 두둔하는 태도를 취하자 홍걸씨의 국제전화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통화도 ‘엿들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가능성은 높다. 국제전화는 도청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신건 원장 취임 이후에는 신원장과 가깝다고 알려진 사람까지 도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성 당시 2차장이 주도한 일이었다. 김차장과 그의 핵심 측근인 정성홍 경제과장이 ‘진승현 게이트’에 관련돼 있다는 얘기를 사전에 귀띔 받은 신원장이 국정원장 취임 이후 두 사람을 제거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는 게 정성홍씨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정형근 의원의 폭로 이후 “국정원이 광범위하게 도청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국정원의 이런 ‘원죄’와도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도청자료를 입수했다”는 정의원의 폭로가 진실이라고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 쪽에서는 “정의원이 말하는 도청자료의 ‘실체’를 파악했다”고 말하고 있다. 적어도 정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국정원의 도청자료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의원은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국정원과 정의원의 주장이 워낙 팽팽히 맞서 있어 어느 쪽이 진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의원의 행태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 변호사는 “정의원이 안기부 재직 시절 행한 ‘정치공작’은 차치하고라도 본인 주장대로 도청 사실을 알았다면 이를 고발, 도청을 뿌리 뽑는 계기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청자료’ 운운하며 정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법조인 출신으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한나라당도 정의원의 국정원 공격을 ‘즐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국정원의 한 전직 고위 간부 K씨는 “국정원의 도청자료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특정 후보 캠프에 흘러 들어가는 것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 금지에 위반되는 것”이라면서 “한나라당으로서야 당장 대선 국면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이를 활용하고 있겠지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K씨는 국정원 핵심 간부가 ‘진승현·정현준 게이트’에 관련돼 구속된 것도 사실은 그 씨앗이 97년 대선 때 뿌려졌다고 분석한다. 두 사건에 관련돼 구속된 김은성 전 차장이나 김형윤 전 단장, 정성홍 전 과장 등이 모두 97년 대선 때의 ‘공적’으로 국정원 내에서도 ‘실세’로 부각했다. 당연히 권력 주변에 모여드는 ‘부나비’들에게는 좋은 표적이 됐고, 이들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그들 자신의 몰락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과 정권에도 피해를 입혔다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국정원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정원 내외부 모두 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권 말기 때마다 정치권 줄 대기를 하는 내부 직원들도 문제지만 국정원 자체가 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권 역시 정보기관을 이용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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