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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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선 보고서’ 이희호 여사도 칭찬”

홍걸씨, 이여사 말도 듣지 않은 듯… 권노갑씨는 국정원 관계자 처벌 요구

  •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4-09-30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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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선 보고서’ 이희호 여사도 칭찬”
    ”이희호 여사가 ‘역시 국가정보원이 최고’라고 칭찬했다.” 지난 2000년 연말 무렵 전 국정원 2차장 김은성씨가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털어놓은 얘기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국정원 2인자의 갑작스러운 이 말에 직원들이 궁금증을 나타내자 김씨는 자랑스러운 듯 자세한 내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에서는 한때 민주당 상임고문 권노갑씨의 특별보좌관을 맡았던 최규선씨가 김대중 대통령 3남 홍걸씨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다. 홍걸씨가 최규선씨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대책도 담고 있었다. 이희호 여사도 뒤늦게 이 보고서의 내용을 인정하고 원장님(임동원 원장)과 나를 불러 오찬을 베풀면서 ‘국정원이 미리 경고를 해줘 고맙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김은성씨의 설명은 국정원이 최규선씨 비리 파일을 담은 ‘최규선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얘기였다. 김씨는 최근 공개된 ‘탄원서’에서도 ‘최규선 보고서’ 문제를 언급했다. 이 보고서는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로 5월3일 검찰에 구속된 권노갑씨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권씨는 검찰에 출두하면서 “2000년 7월경 김은성씨가 집으로 찾아와 홍걸씨와 최규선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최규선 보고서’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김홍걸-최규선 커넥션’에 대해 2년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여권 핵심에서 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청와대에서 묵살한 것인가, 아니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 시행하라는 김대통령의 지시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인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둘째, 권씨의 발언을 통해 국정원 고위 간부가 권씨에게 정보보고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권씨가 현 정권의 핵심 실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국정원 2차장이 보고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 기관이지 집권 여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 더구나 권씨는 여당의 당직자 신분도 아니다. 자칫 국정원의 정치 개입 망령을 되살릴 수 있는 대목이다.



    셋째, 김은성씨가 4월21일 자신의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0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밝힌 내용의 진위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김씨는 탄원서에서 “2년 전 최씨의 비리 혐의를 종합한 뒤 청와대에 보고했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청와대와 검찰의 뒷조사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최규선 보고서’를 둘러싸고 최근 이러저러한 논란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국정원 외부의 시각은 싸늘하다. 국정원이 ‘법외 업무’를 하다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들었다는 시각이다. 한 부장급 특수부 검사는 “국정원의 직무를 규정하고 있는 현행 국가정보원법 어디에도 대통령 친인척 관련 비리 혐의를 수집하라는 내용은 없다”고 전제하고, “비록 현실적 필요성은 인정한다고 해도 첫 단추를 잘못 뀄기 때문에 사태가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확산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규선 보고서’ 이희호 여사도 칭찬”
    이 검사는 “검찰도 제 역할을 못했다는 점은 인정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최규선씨가 홍걸씨 위세를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뒤늦게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범죄 정보 수집 기능을 갖고 있는 검찰은 그동안 뭘 하다 대통령 임기 말이 된 이제야 ‘권력형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법석을 떠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정원의 ‘최규선 보고서’도 홍걸씨를 견제하는 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홍걸씨는 그만큼 최씨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희호 여사가 홍걸씨를 만류하지 못했던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관계자는 “이희호 여사가 이례적으로 국정원 수뇌부를 불러 오찬까지 베풀며 칭찬한 것은 국정원의 ‘최규선 보고서’를 뒤늦게 인정하고 홍걸씨에게 최규선씨를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직후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최근의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결과적으로 홍걸씨가 이희호 여사 말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분석했다.

    최씨는 2000년 2월 무렵부터 6개월여 동안 권노갑씨의 특별보좌역을 역임하는 등 한때 권씨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 무렵 권씨는 2000년 4월 총선을 진두지휘하는 등 정권교체 이후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권씨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권씨 아들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에 취직시켜 준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게 권씨 주변 인사들의 얘기다.

    최씨는 이 무렵 권씨의 특보로 있으면서 권씨에게 줄을 대려는 정·관계 인사들에게 면담 일정을 잡아주는 등의 역할을 하며 위세를 부렸다. 특히 4·13 총선 직전 권씨를 만나려는 정치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때는 “권씨에게는 반절을 해도 최씨에게는 큰절을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권씨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최씨의 행태를 포착한 국정원 등 사정당국에서는 2000년 4월 무렵부터 최씨의 문제점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씨는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부터 소장파 ‘5인 비서’ 중 한 명으로 위세를 부리며 이권에 개입한다는 얘기가 떠도는 등 뒷말이 많았던 인물. 최씨는 이후 청와대 입성 뜻을 이루지 못하고 98년 9월에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수사를 받게 되자 해외로 출국했다.

    최규선씨의 복귀 이후 국정원 등 사정당국은 최씨에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이 ‘최규선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 이후 국정원 고위 간부들은 권노갑씨와 홍걸씨로부터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느냐”고 심한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권씨는 ‘최규선 보고서’를 작성한 국정원 실무자들의 사표를 받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권씨의 ‘노기’는 국정원 수뇌부가 나서 문책인사를 단행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됐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최규선 보고서’를 바라보는 권씨의 태도는 과거 야당 시절 쌓인 국정원에 대한 불신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고 기억했다. 국정원이 과거 야당을 음해했던 것처럼 능력 있는 젊은이를 괜히 물고늘어진다는 태도를 보이는 등 최규선씨를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는 것.

    최씨는 이 과정에 오히려 국정원 고위 간부들을 전화로 불러낼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다는 게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뿐만 아니라 홍걸씨도 국정원이 더 이상 최씨의 뒷조사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권씨와 만나기 위해 최씨와 어쩔 수 없이 접촉해야 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최씨는 국정원 실·국장급 이하는 심부름꾼 정도로 취급하는 등 안하무인이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권노갑씨가 국정원의 ‘최규선 보고서’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김은성씨가 2000년 7월경 권노갑씨 집을 찾아가 ‘최규선 보고서’ 사본을 보고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당시 김은성씨를 수행해 권씨 집에 함께 갔던 국정원 문모 사무관도 검찰에서 “김은성씨가 노란 봉투를 들고 간 것으로 기억한다”고 진술해 이런 정황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 진술이 맞는다면 김은성씨는 업무상 취득한 기밀을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권노갑씨에게 누설한 셈이 된다. 그러나 김은성씨 변호인 임운희 변호사는 “김씨가 2000년 7월 권씨를 찾아간 것은 권씨가 최씨를 계속 두둔하자 ‘최규선씨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권씨는 이때까지도 최씨를 굳게 신임하고 있었다.

    최씨의 행각은 그로부터 한 달 후 MBC 보도로 그 일각이 들통나게 된다. ‘대통령 특보’를 사칭하며 공항 귀빈실을 무시로 이용해 온 사실이 밝혀진 것. 이를 계기로 권씨의 마음도 최씨에게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권씨가 MBC 보도 직후 최씨에게 사무실 출입 금지령을 내렸고, 국정원 관계자들에 대한 오해도 풀었기 때문.

    국정원이 한때나마 권력 실세의 오해를 받은 데 따른 후유증은 컸다. 2000년 8월 이후에는 ‘김홍걸-최규선 커넥션’에 대한 보고가 청와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국정원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괜히 손해볼 짓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에 따라 권씨 곁을 떠난 최씨는 오히려 홍걸씨와 밀착하게 됐고, 이후 이를 아무도 견제하지 못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최씨의 위세를 확인한 국정원 간부들이 오히려 최씨에게 줄을 대고 김은성씨와 최씨가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국정원 관계자들은 이런 점에서 김은성씨의 탄원서 내용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김은성씨는 “최씨의 비리 혐의를 보고한 후 오히려 청와대와 검찰로부터 뒷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정원 관계자는 “최규선씨 뒤에 있는 홍걸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씨와 가까이 지낸 김은성씨가 청와대 뒷조사를 받았다고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최규선 보고서’는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최규선 보고서’를 전달받은 초기 단계에서 국정원에는 본연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최씨 비리를 검찰에 통보해 엄정하게 수사하도록 했다면 ‘최규선 게이트’는 초기 단계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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