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이사회에서 마이크론과의 양해각서(MOU)가 부결된 지 사흘 만인 지난 5월3일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 하이닉스 고위 임원진과 내로라 하는 국내 증권사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마주 앉았다. 하이닉스측이 외부에는 일절 알리지 않은 채, 시장 영향력이 지대한 베스트 애널리스트만 불러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하이닉스 임원진은 4월30일 이사회에서, 채권단 동의까지 얻었던 메모리 분야 매각 방안이 부결된 배경에 대해 주로 설명하고 독자생존론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닉스측 주장의 핵심은 외부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하이닉스 이사회가 매각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매각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메모리 사업 매각 후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검토한 결과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마이크론과의 MOU를 부결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이닉스 채권단과 마이크론 간에 맺은 양해각서는 효력 발생의 전제조건으로 채권단과 하이닉스 이사회가 양해각서 내용은 물론 잔존법인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도 승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 가지 문제를 따로따로 표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 당연히 재무구조 개선 방안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매각 자체도 찬성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 밖에도 하이닉스 임원진은 채권단이 메모리 부분 매각 후 마이크론에 지원하는 금액의 일부만 하이닉스에 지원하더라도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그동안의 논리를 다시 강조했다.
하이닉스 임원진이 애널리스트들을 불러모아 이런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이닉스측이 매각협상 결렬 이후 발 빠르게 시장을 다독거리고 독자생존론의 불을 지피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이닉스측은 양해각서 부결 이후 애초 검토했던 ‘비메모리 매각, 메모리 잔존’이라는 역(逆)분리매각 방안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물론 메모리 분야를 중심으로 독자생존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 반면 채권단측은 ‘분할매각’이라는 원칙을 세워놓았지만 독자생존은 배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채권단은 하이닉스측이 독자생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부채탕감 비율이나 잔여 채무 분할상환, 이자지급 유예, 유상증자 방안 등에 대해 여전히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채권단의 당초 의중대로 메모리 매각이든 하이닉스측의 주장대로 비메모리 매각이든 간에 양쪽 모두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매각협상 결렬로 진퇴양난에 처한 채권단이 내놓은 분할매각 방안 역시 ‘고육지책’일 뿐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 SK증권 전우종 팀장은 “채권단 역시 손해보고 파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중에 완전히 발목 잡히는 것보다 지금쯤 빠져나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결국 메모리 매각이든 비메모리 매각이든, 두 가지 방법 모두 ‘하이닉스호(號)’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먼저 메모리 매각의 경우를 보자. 하이닉스는 메모리 분야 매각 후 잔존 법인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6조원 규모 채무의 대부분인 91%를 탕감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4월26일자 ‘메모리 사업 매각 후 하이닉스 재무구조 개선 방안’ 대외비 보고서). 뿐만 아니라 하이닉스는 이 보고서에서 메모리 분야 매각대금으로 받은 마이크론의 주식 전량을 회사에 유보하고 주주들의 매수청구권 행사 등으로 우발채무가 발생할 경우 마이크론 주식을 처분하기까지 별도의 브리지론(bridge loan)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렇게 할 경우에도 차입금 회수율은 28% 정도에 머물 것이라는 분석.
특히 보고서는 메모리 사업 매각 후 과다 부채로 인해 하이닉스가 파산 위험에 처할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법인 자체가 파산할 경우 파산법 규정에 따라 마이크론과 맺은 메모리 사업 매각 계약 자체가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것. 사외이사 중 한 명인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대표는 “파산법상 ‘부인권’ 규정에 따라 파산 시점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이루어진 계약은 무효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이 같은 하이닉스측의 잔존 법인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측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에 대해 ‘한마디로 거저 먹겠다는 방안’이라고 일축했다.
특히 하이닉스측의 이 보고서는 비슷한 시기에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에서 만든 재무구조 개선 방안과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을 빚고 있다. 외환은행이 작성한 메모리 사업 매각 후 재무구조 개선 방안은 3조5000억원 규모 무담보채권의 50%를 탕감한다는 수준. 부채탕감 규모만 해도 하이닉스 보고서와는 4배 이상 차이가 난다. 또 여기에는 13.5대 1 비율의 감자(減資)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하이닉스측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채무 재조정안을 놓고 열린 채권단회의에서도 이 보고서에 근거한 잔존 법인 생존 가능성에 대해 막판까지 격론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메모리 분야 매각 후 잔존 법인의 운명과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비관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비메모리 분야의 파운드리(수탁가공 생산)만으로 하이닉스 잔존 법인이 생존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파운드리는 닌텐도 등 주요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웨이퍼 디자인만 주문생산하는 방식.
반도체 애널리스트인 메리츠증권 최석포 연구위원은 “대만, 싱가포르 등 선두업체들이 시장의 92%를 점유한 상황에서 하이닉스 잔존 법인의 영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재무구조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비메모리 분야로는 장사해서 남길 만한 이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병서 대우증권 조사부장 역시 “1조원 매출도 안 되는 회사가 3조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서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한다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채권단은 지난 5월3일 운영위원회에서 하이닉스를 메모리 사업, 비메모리 사업, 단순조립 사업, 초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등 사업 부문별로 쪼갠 뒤 경쟁력 여부에 따라 매각한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비메모리 사업이 매각 1순위에 오를 공산이 크다. 비메모리 사업 매각의 경우 하이닉스측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애초 하이닉스측이 마련해 채권단 등에 제출했던 ‘하이닉스 독자생존 방안’이라는 대외비 보고서에서도 회사측은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했을 때 △경기변동에 대한 저항성 약화 △메모리 사업 노후 시설 활용 기회 상실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비메모리 사업은 2000∼2001년 큰 폭의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6억 달러 수준의 안정적 매출을 보여, 반도체 매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기변동의 위험을 흡수하는 ‘쿠션’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 이 때문에 하이닉스측에서도 단계별 분리매각 방안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비메모리를 포함한 기타 분야를 분리 매각한다 하더라도 남게 되는 메모리 분야의 경쟁력 여부다. 하이닉스의 3월 말 현재 총 차입금은 6조5000억원. 이중 담보 차입금이 2조7000억원 수준이고 비담보 차입금이 3조8000억원 정도다. 만약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할 경우 부채를 없앤 클린컴퍼니(clean company)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6조원대의 부채는 고스란히 메모리 법인에 남겨둘 수밖에 없다. 아무리 메모리 분야가 비메모리 분야보다 경쟁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 부채를 떠안고 생존할 수 있을지가 분할매각안의 관건인 셈이다. 특히 내년까지는 어떻게 버틴다 해도 2004년 집중적으로 만기가 돌아오는 3조4000억원대의 부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다. 채권단이 이 부채의 만기를 재조정해 주지 않는 한 메모리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은 불가능해진다.
메모리 분야든 비메모리 분야든 간에 채권단의 분할매각 방안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우증권 전병서 조사부장은 “경쟁력 없는 분야를 팔겠다고 나서는데 살 사람이 있겠느냐도 의문이지만, 인수 합병이 대세인 글로벌 마켓에서 구멍가게로 쪼개 팔아서 승산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SK증권 전우종 팀장 역시 “비메모리 분야를 하이닉스에서 떼어내 팔려고 할 경우 세계적인 공급과잉 상태에서 매각 성사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데다 LG전자 등 기존 휴대폰 메이커 등을 상대로 계속 영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회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어떻든 분할매각 방안은 조만간 현 이사회에 안건으로 제출될 가능성이 크다. 채권단의 출자전환에 따라 새로 이사회를 구성하려면 이사회 개최-주총 결의 등 상법상 절차를 거치는 데만도 한 달 이상 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 채권단측이 이사회가 다시 분할매각안을 거부할 경우 구조조정 촉진법상 채권단 관리기업의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조만간 열릴 이사회 역시 이 방안에 동의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구촉법상 채권단 관리기업에서 해제되면 채무 만기 연장 방안 등이 백지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될 경우 하이닉스는 법정관리로 갈 가능성이 크다. 하이닉스의 한 사외이사는 “이사회도 비주력 사업 매각 등 다양한 방안을 회사측에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채권단과 회사측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분할매각안이 이사회에서 확정되더라도 인수자 물색, 가격 협상 등 남는 문제는 첩첩산중이다.
하이닉스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 역시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 결렬 이후 하이닉스 처리 방향에 관한 컨설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채권단의 분할매각 방안이 어떤 모습으로 수면 위에 드러날지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컨설팅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컨설팅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는 두 달 정도 걸릴 것이라는 게 외환은행측의 설명이다. 그 전까지는 ‘쪼개서 판다’는 원칙론만 이사회에 넘겨 동의를 구한다는 방침. 결국 당분간 하이닉스와 채권단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지난해 말에 비해 반도체 가격이 다소 상승하면서 하이닉스가 당장 유동성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도 사태의 장기화를 점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채권단 관계자들은 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동상이몽이 깨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자리에서 하이닉스 임원진은 4월30일 이사회에서, 채권단 동의까지 얻었던 메모리 분야 매각 방안이 부결된 배경에 대해 주로 설명하고 독자생존론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하이닉스측 주장의 핵심은 외부에서 평가하는 것처럼 하이닉스 이사회가 매각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매각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메모리 사업 매각 후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검토한 결과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마이크론과의 MOU를 부결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이닉스 채권단과 마이크론 간에 맺은 양해각서는 효력 발생의 전제조건으로 채권단과 하이닉스 이사회가 양해각서 내용은 물론 잔존법인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도 승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 가지 문제를 따로따로 표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 당연히 재무구조 개선 방안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매각 자체도 찬성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 밖에도 하이닉스 임원진은 채권단이 메모리 부분 매각 후 마이크론에 지원하는 금액의 일부만 하이닉스에 지원하더라도 독자생존이 가능하다는 그동안의 논리를 다시 강조했다.
하이닉스 임원진이 애널리스트들을 불러모아 이런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이닉스측이 매각협상 결렬 이후 발 빠르게 시장을 다독거리고 독자생존론의 불을 지피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이닉스측은 양해각서 부결 이후 애초 검토했던 ‘비메모리 매각, 메모리 잔존’이라는 역(逆)분리매각 방안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물론 메모리 분야를 중심으로 독자생존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 반면 채권단측은 ‘분할매각’이라는 원칙을 세워놓았지만 독자생존은 배제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채권단은 하이닉스측이 독자생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부채탕감 비율이나 잔여 채무 분할상환, 이자지급 유예, 유상증자 방안 등에 대해 여전히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채권단의 당초 의중대로 메모리 매각이든 하이닉스측의 주장대로 비메모리 매각이든 간에 양쪽 모두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매각협상 결렬로 진퇴양난에 처한 채권단이 내놓은 분할매각 방안 역시 ‘고육지책’일 뿐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 SK증권 전우종 팀장은 “채권단 역시 손해보고 파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중에 완전히 발목 잡히는 것보다 지금쯤 빠져나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결국 메모리 매각이든 비메모리 매각이든, 두 가지 방법 모두 ‘하이닉스호(號)’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먼저 메모리 매각의 경우를 보자. 하이닉스는 메모리 분야 매각 후 잔존 법인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6조원 규모 채무의 대부분인 91%를 탕감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4월26일자 ‘메모리 사업 매각 후 하이닉스 재무구조 개선 방안’ 대외비 보고서). 뿐만 아니라 하이닉스는 이 보고서에서 메모리 분야 매각대금으로 받은 마이크론의 주식 전량을 회사에 유보하고 주주들의 매수청구권 행사 등으로 우발채무가 발생할 경우 마이크론 주식을 처분하기까지 별도의 브리지론(bridge loan)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렇게 할 경우에도 차입금 회수율은 28% 정도에 머물 것이라는 분석.
특히 보고서는 메모리 사업 매각 후 과다 부채로 인해 하이닉스가 파산 위험에 처할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법인 자체가 파산할 경우 파산법 규정에 따라 마이크론과 맺은 메모리 사업 매각 계약 자체가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것. 사외이사 중 한 명인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대표는 “파산법상 ‘부인권’ 규정에 따라 파산 시점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이루어진 계약은 무효화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이 같은 하이닉스측의 잔존 법인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은 ‘제로’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측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에 대해 ‘한마디로 거저 먹겠다는 방안’이라고 일축했다.
특히 하이닉스측의 이 보고서는 비슷한 시기에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에서 만든 재무구조 개선 방안과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을 빚고 있다. 외환은행이 작성한 메모리 사업 매각 후 재무구조 개선 방안은 3조5000억원 규모 무담보채권의 50%를 탕감한다는 수준. 부채탕감 규모만 해도 하이닉스 보고서와는 4배 이상 차이가 난다. 또 여기에는 13.5대 1 비율의 감자(減資)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하이닉스측의 재무구조 개선 방안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채무 재조정안을 놓고 열린 채권단회의에서도 이 보고서에 근거한 잔존 법인 생존 가능성에 대해 막판까지 격론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메모리 분야 매각 후 잔존 법인의 운명과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비관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비메모리 분야의 파운드리(수탁가공 생산)만으로 하이닉스 잔존 법인이 생존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파운드리는 닌텐도 등 주요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웨이퍼 디자인만 주문생산하는 방식.
반도체 애널리스트인 메리츠증권 최석포 연구위원은 “대만, 싱가포르 등 선두업체들이 시장의 92%를 점유한 상황에서 하이닉스 잔존 법인의 영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재무구조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비메모리 분야로는 장사해서 남길 만한 이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병서 대우증권 조사부장 역시 “1조원 매출도 안 되는 회사가 3조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서야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한다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채권단은 지난 5월3일 운영위원회에서 하이닉스를 메모리 사업, 비메모리 사업, 단순조립 사업, 초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등 사업 부문별로 쪼갠 뒤 경쟁력 여부에 따라 매각한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비메모리 사업이 매각 1순위에 오를 공산이 크다. 비메모리 사업 매각의 경우 하이닉스측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애초 하이닉스측이 마련해 채권단 등에 제출했던 ‘하이닉스 독자생존 방안’이라는 대외비 보고서에서도 회사측은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했을 때 △경기변동에 대한 저항성 약화 △메모리 사업 노후 시설 활용 기회 상실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비메모리 사업은 2000∼2001년 큰 폭의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6억 달러 수준의 안정적 매출을 보여, 반도체 매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기변동의 위험을 흡수하는 ‘쿠션’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 이 때문에 하이닉스측에서도 단계별 분리매각 방안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비메모리를 포함한 기타 분야를 분리 매각한다 하더라도 남게 되는 메모리 분야의 경쟁력 여부다. 하이닉스의 3월 말 현재 총 차입금은 6조5000억원. 이중 담보 차입금이 2조7000억원 수준이고 비담보 차입금이 3조8000억원 정도다. 만약 비메모리 사업을 매각할 경우 부채를 없앤 클린컴퍼니(clean company)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6조원대의 부채는 고스란히 메모리 법인에 남겨둘 수밖에 없다. 아무리 메모리 분야가 비메모리 분야보다 경쟁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 부채를 떠안고 생존할 수 있을지가 분할매각안의 관건인 셈이다. 특히 내년까지는 어떻게 버틴다 해도 2004년 집중적으로 만기가 돌아오는 3조4000억원대의 부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골칫거리다. 채권단이 이 부채의 만기를 재조정해 주지 않는 한 메모리 잔존 법인의 생존 가능성은 불가능해진다.
메모리 분야든 비메모리 분야든 간에 채권단의 분할매각 방안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우증권 전병서 조사부장은 “경쟁력 없는 분야를 팔겠다고 나서는데 살 사람이 있겠느냐도 의문이지만, 인수 합병이 대세인 글로벌 마켓에서 구멍가게로 쪼개 팔아서 승산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SK증권 전우종 팀장 역시 “비메모리 분야를 하이닉스에서 떼어내 팔려고 할 경우 세계적인 공급과잉 상태에서 매각 성사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데다 LG전자 등 기존 휴대폰 메이커 등을 상대로 계속 영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회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어떻든 분할매각 방안은 조만간 현 이사회에 안건으로 제출될 가능성이 크다. 채권단의 출자전환에 따라 새로 이사회를 구성하려면 이사회 개최-주총 결의 등 상법상 절차를 거치는 데만도 한 달 이상 걸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 채권단측이 이사회가 다시 분할매각안을 거부할 경우 구조조정 촉진법상 채권단 관리기업의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조만간 열릴 이사회 역시 이 방안에 동의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구촉법상 채권단 관리기업에서 해제되면 채무 만기 연장 방안 등이 백지화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될 경우 하이닉스는 법정관리로 갈 가능성이 크다. 하이닉스의 한 사외이사는 “이사회도 비주력 사업 매각 등 다양한 방안을 회사측에 권고하고 있기 때문에 채권단과 회사측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분할매각안이 이사회에서 확정되더라도 인수자 물색, 가격 협상 등 남는 문제는 첩첩산중이다.
하이닉스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 역시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 결렬 이후 하이닉스 처리 방향에 관한 컨설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채권단의 분할매각 방안이 어떤 모습으로 수면 위에 드러날지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컨설팅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컨설팅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는 두 달 정도 걸릴 것이라는 게 외환은행측의 설명이다. 그 전까지는 ‘쪼개서 판다’는 원칙론만 이사회에 넘겨 동의를 구한다는 방침. 결국 당분간 하이닉스와 채권단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지난해 말에 비해 반도체 가격이 다소 상승하면서 하이닉스가 당장 유동성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도 사태의 장기화를 점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채권단 관계자들은 사태의 장기화 가능성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동상이몽이 깨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