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우리 사회는 지나친 경쟁과 다툼이 지배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쟁이 국민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국민은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염증을 낸다. 그런데 과연 정치권만이 문제일까? 이런 정치를 연출하게 해준 국민에게도 큰 잘못이 있다. 국민은 지역 패거리 정치의 볼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지원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도 역시 국민공동체의 전체 이익보다는 자기 지역, 자기 출신 학교, 또 자기 계층의 부분이익이 훨씬 더 중요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지역패거리 정치를 기꺼이 따르고 또 이를 요구한다. 그러니 한국 정치의 문제는 비단 정치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온 국민의 문제다.
그러나 이렇게 온 국민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특정한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말과 같으니, 그야말로 무책임한 말일 수 있다. 필자는 그 ‘국민’ 중에서도 기득권층 또는 ‘가진 자’의 책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알기 쉽게 교육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교육의 병폐로 지적되는 공교육의 붕괴, 사교육의 기승, 대학 서열화 고착 등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까닭은 가진 자들이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세칭 일류대학들은 시험 점수 최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이하는 데 불리한 모든 제도에 필사적으로 반대한다. 말로는 교육개혁과 대학개혁을 외치지만,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기 학교에 점수 높은 학생들을 더 많이 선발하느냐에 있다. 상류층 학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우수한 대학에 입학시키느냐에 골몰하여 진정한 교육에 역행하는 과잉 사교육 경쟁을 할 뿐, 공교육 발전이나 대학 서열화의 완화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주류 언론들은 이런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대학의 ‘경쟁력’과 시장 원리를 전파하기에 바쁘고 공교육의 건전한 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주류 언론 역시 자녀를 일류대학에 입학시키는 데 온 관심을 쏟는 일류대학 출신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교육부가 어떤 제도를 내놓더라도 이들은 비상한 머리로 자신들의 이익 독점 구조를 지킬 방안을 생각해낸다. 그 결과 공교육은 더욱 황폐해지고 사교육이 이를 대체하며 심지어 조기유학과 교육 이민이 급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은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문제를 이렇게 악화시킨 것이 과연 정부만의 책임인가, 그렇게 선동하는 언론의 책임은 없는가?
이들의 행동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경쟁력 제고’다. 경쟁력이란 말을 좁게 보면 균형 발전이나 공공성 확대와는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지방대학들을 내팽개치고 서울대에만 모든 자본을 투자하면 세계 일류의 대학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래야 하느냐에 있다. 사회와 국민의 수준이 일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대학만 일류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적 계급 갈등의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 이는 대안이 아니다. 그러나 기득권층에서는 이를 목표로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는 이에 굴복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
한국의 가진 자들에게는 가진 자의 덕목이 없다. 그 덕목은 양보와 박애의 정신이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사회를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들이 덕목을 갖지 못하는 까닭은 덕목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갑자기 돈이 많아져 그 돈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주체 못하는 돈에 군침 흘리는 없는 자들을 보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발전은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려면 가진 자들의 문화적 소양과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공적·사적 행동들이 있어야 한다.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고, 시민·문화·종교 단체들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정부와 언론이 이에 중요한 구실을 담당해야 하지만, 이들도 대개는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또한 가진 자의 덕목이 아니라면 ‘여유’라도 가져보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이렇게 온 국민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특정한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말과 같으니, 그야말로 무책임한 말일 수 있다. 필자는 그 ‘국민’ 중에서도 기득권층 또는 ‘가진 자’의 책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알기 쉽게 교육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교육의 병폐로 지적되는 공교육의 붕괴, 사교육의 기승, 대학 서열화 고착 등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까닭은 가진 자들이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비롯한 세칭 일류대학들은 시험 점수 최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이하는 데 불리한 모든 제도에 필사적으로 반대한다. 말로는 교육개혁과 대학개혁을 외치지만,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기 학교에 점수 높은 학생들을 더 많이 선발하느냐에 있다. 상류층 학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우수한 대학에 입학시키느냐에 골몰하여 진정한 교육에 역행하는 과잉 사교육 경쟁을 할 뿐, 공교육 발전이나 대학 서열화의 완화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주류 언론들은 이런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대학의 ‘경쟁력’과 시장 원리를 전파하기에 바쁘고 공교육의 건전한 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주류 언론 역시 자녀를 일류대학에 입학시키는 데 온 관심을 쏟는 일류대학 출신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교육부가 어떤 제도를 내놓더라도 이들은 비상한 머리로 자신들의 이익 독점 구조를 지킬 방안을 생각해낸다. 그 결과 공교육은 더욱 황폐해지고 사교육이 이를 대체하며 심지어 조기유학과 교육 이민이 급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은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선동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문제를 이렇게 악화시킨 것이 과연 정부만의 책임인가, 그렇게 선동하는 언론의 책임은 없는가?
이들의 행동에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경쟁력 제고’다. 경쟁력이란 말을 좁게 보면 균형 발전이나 공공성 확대와는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지방대학들을 내팽개치고 서울대에만 모든 자본을 투자하면 세계 일류의 대학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래야 하느냐에 있다. 사회와 국민의 수준이 일류가 안 되는데, 어떻게 대학만 일류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극단적 계급 갈등의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 이는 대안이 아니다. 그러나 기득권층에서는 이를 목표로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는 이에 굴복하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
한국의 가진 자들에게는 가진 자의 덕목이 없다. 그 덕목은 양보와 박애의 정신이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사회를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들이 덕목을 갖지 못하는 까닭은 덕목을 배울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갑자기 돈이 많아져 그 돈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주체 못하는 돈에 군침 흘리는 없는 자들을 보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발전은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려면 가진 자들의 문화적 소양과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공적·사적 행동들이 있어야 한다.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이란 있을 수 없고, 시민·문화·종교 단체들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정부와 언론이 이에 중요한 구실을 담당해야 하지만, 이들도 대개는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또한 가진 자의 덕목이 아니라면 ‘여유’라도 가져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