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8

..

상복 터진 연예계, 뺨 맞은 방송사

연말 연기대상서 상 남발 … “권위·신뢰 상실” 시청자 비난 빗발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1-05 15:0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상복 터진 연예계, 뺨 맞은 방송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말에 딱히 어디 갈 데도 없이 안방을 지키고 있는 ‘방콕족’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가 각 채널에서 방송하는 ‘연기대상’ 시상식을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연기대상의 경우 한 해 동안 각각의 드라마에 출연해 주목받았던 연기자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자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시청자들은 ‘누가 어떤 상을 받나’ ‘올해 최고의 연기자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시상식을 지켜보면서 수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눈물로 채 잇지 못하는 수상 소감에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연말 방영된 방송 3사의 연기대상 시상식은 이런 감동을 전달받기에 어딘지 부족하고 한편으론 이상하기까지 했다. 유난히 공동수상이 많았고, 트로피 수도 방송사별로 적게는 30개에서 많게는 50개에 이르렀다. ‘연기상’ ‘우수연기상’ ‘최우수연기상’ ‘대상’까지 쪼개고 또 쪼갠 이름의 상을 주고받느라 어떤 상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상복 터진 연예계, 뺨 맞은 방송사
    방송사별로 살펴보면, KBS는 대상과 남녀 최우수 연기상을 제외하고 남녀 우수연기상·인기상·조연상·신인상·작가상에서 모두 공동 수상이었고, 여자 인기상은 둘도 아닌 세 명에게 돌아갔다. MBC는 신인상과 최우수 연기상·남자 우수연기상이 모두 공동 수상이었고, 특별상 수상자는 9명에 이르렀다.

    방송사 중에서도 고심한 흔적이 가장 역력한 곳은 SBS였다. SBS는 연기상도 단막·특집극, 드라마스페셜, 연속극, 시트콤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각각 남녀 한 명씩 선정했고, 10대 스타상을 받은 10명의 연기자와 신인을 대상으로 한 뉴스타상 수상자 8명은 한꺼번에 무대에 올라 줄줄이 트로피를 받았다. ‘SBSi상’이란 것도 있었고, 인기상 조연상 공로상 우정상 특별상까지 수여하고 보니 시상식장에 참석한 연기자들 대부분이 트로피 하나씩은 받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상복 터진 시상식이었다.



    급기야 마지막 대상마저 공동수상으로 장식한 SBS. ‘여인천하’의 두 히로인 전인화와 강수연이 나란히 서서 축하받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된 순간부터 방송국 인터넷 게시판에는 연기대상의 공정성과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청자들의 글이 쏟아졌다.

    “어떤 기준에서 상을 주는 것인지 정확한 기준을 알 수 없어 상의 공정성을 인정하기 힘들다.”(이현숙) “연기력보다 드라마 시청률과 인기도가 상의 기준이 되고 있어 ‘연기대상’이라기보다는 ‘시청률 공헌상’이나 ‘스타상’이라고 해야 할 듯.”(신성은) “신인상도 아니고 대상을 2명에게 줄 수 있는가. 방송사가 연기자들 눈치 보면서 스스로 상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다.”(장윤중)

    시청자들은 방송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연기자들에게 상을 남발함으로써 권위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심지어 상 주고 욕먹는 경우까지 생긴다. SBS 신인상 수상자 8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한 연기자는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뻤지만 막상 가서 보니 너무 많은 사람이 받는 상이어서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상 하나를 놓고 엄정하게 우열을 가리지 못하는 방송사의 처사에 시청자들은 불만을 느끼고 있지만, 이런 상의 심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방송 관계자들은 호소한다. 방송사로서는 자사 드라마에 출연한 모든 연기자가 소중하고, 이들 중 누군가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SBS의 경우 지난해에 다른 방송사를 압도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유달리 많아 연기대상 선정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여인천하’에서 대상이 나오리라는 것은 진작부터 예상된 일. SBS 드라마국의 한 관계자는 “사내 PD들을 대상으로 1차 설문조사를 했을 때, 1명을 적도록 했는데도 태반이 강수연, 전인화 두 사람을 적어냈다. CP 및 본부장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 회의에서도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잔치 분위기를 깨지 말고 두 사람 모두에게 상을 주자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안다”고 전한다.

    상복 터진 연예계, 뺨 맞은 방송사
    ‘잔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방송사 입장에서 연기대상 시상식은 ‘컨테스트’라기보다 ‘페스티벌’의 의미에 가깝다. 농부들이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추수감사제를 열듯, 풍성하게 상을 차려놓고 그동안 고생한 연기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줌으로써 고마움을 표시하는 장이라는 것. MBC 심의실의 조기양 부장은 “상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굳이 선별해야겠지만, 방송사 연기대상에서의 상은 ‘잘했다’는 의미와 함께, ‘잘해달라’는 격려의 의미도 많다”고 말한다.

    방송사마다 연기자 섭외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상 하나 손에 쥐어주면 얘기하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연기대상 수상은 다음 작품 캐스팅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실제로 KBS 여자연기상을 수상한 이요원, 이승연, 한고은 등은 올해 KBS 드라마에 출연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SBS의 경우엔 올해까지 끌고 가야 할 드라마 ‘여인천하’의 팀워크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엔 정말 섭외 전쟁이다. 캐스팅이 힘들어지면 ‘상도 받았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의리에 호소하기도 한다. 수상한 연기자들에겐 방송사에서도 이것저것 신경 써주게 된다. 연말 연기대상 수상은 연기자들의 수입원인 광고와 드라마 출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기자들도 수상 여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KBS 드라마국 엄기백 차장)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상식 참석을 요구해도 “상을 받는 것이 확실할 경우에만 참석하겠다”며 은근히 압력(?)을 넣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옷만 차려입고 나와 시상식의 들러리가 되는 건 싫다는 뜻. 연기자들은 수상 여부를 알기 위해 “저 드레스 맞출까요?” “양복 가봉하러 갈까요?”하면서 제작진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방송사가 연기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상의 종류가 많아지고, 공동수상 등의 ‘묘수’가 늘어났다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KBS 엄기백 차장은 “보통은 시상식 전후에 한창 뜨고 있는 드라마 출연자들에게 상이 돌아가는데, 이미 봄·가을쯤 방영이 끝난 드라마라고 시상에서 제외할 수가 없다.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김혜리의 경우, 4월에 ‘태조왕건’ 출연이 끝났지만 그간의 공이 크기 때문에 윤해영과 함께 공동수상자가 됐다. 나름대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라고 말한다.

    SBS는 젊은 스타급 배우들이 주로 출연하는 주말극·미니시리즈 위주의 시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올해 연기상을 장르별로 나누는 바람에 상의 수가 크게 늘었다. SBS 드라마국 김수룡 부장은 “그동안 아침·저녁 일일드라마나 단막극 연기자들은 시상식에서 소외돼 왔다. 그래서 연기자들도 미니시리즈만 하려 든다. 노력한 모든 연기자들에게 고르게 상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보니 장르별 시상을 하게 됐다”고 밝힌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의 본래 취지가 변질되어가는 것은 사실이다. 방송사는 ‘한 해를 정리하는 자체 행사’ ‘고생한 이들에 대한 포상 성격의 행사’라고 강변하지만, 영화계와 달리 방송연기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권위 있는 상이 별달리 없는 지금의 상태에서 각 방송사의 연말 연기대상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미디어평론가 변정수씨는 “‘상’이라는 말값에 걸맞은 권위를 방송사 스스로 획득하지 못하면, 연기대상 시상식은 결국 방송사 홍보 프로그램이나 수많은 오락프로그램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