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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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며 피눈물 흘려요”

제3세계 출신 귀화자 차별 설움 … 취업 힘들고 불법체류자 취급 ‘후회의 나날’

  • <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11-05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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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으로 살며 피눈물 흘려요”
    1999년 겨울 경기도 과천 정부종합청사. 방글라데시아 출신 강수만씨(33·가명)가 귀화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국어 역사 사회 지리 등 과목마다 주·객관식 10문항씩 20문제였다. 난생 처음 치러보는 ‘한국식 시험’. 과목당 60점을 넘지 못하면 한국 국민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물론, 가족과 함께 설계한 인생계획도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98년의 낙방 경험 때문이었을까.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도로의 이름은?’ 같은 간단한 질문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릎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했던 것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 강미영씨(29·가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93년 여름 함께 일하던 공장에서 만나 집안의 엄청난 반대와 불법체류자 신분을 이겨내며 키운 사랑이었다.

    이듬해인 2000년 1월, 드디어 상자에 곱게 접은 태극기와 함께 ‘귀화허가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귀화허가증은 그들에게 ‘행복의 파랑새’로 보였다. 2주가 지난 뒤 파출소에서 찾아온 주민등록증에는 그토록 바라던 주민등록번호 13자리가 또렷했다. 이제 그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계속된 주위의 축하전화. 아내 강씨는 “그 무렵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우리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기억을 되새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상의 시선은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법적인 한국인 신분은 출입국관리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 외에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공장, 무역회사 등 수많은 직장에 원서를 보냈지만 반응은 냉정했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은 한국인 근로자의 임금이 아니라 외국인 연수생 수준. 유창한 한국말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얼른 와 보라’던 이들도 면접장에 들어서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조건 불법체류자 취급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대학 졸업장은 아무 의미가 없었죠.” 강씨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의 가구공장에서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한 해 평균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외국인은 400명 내외. 정식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내에 2년 이상 합법적으로 체류해야 하고, 3000만원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진다. 1년에 한 차례씩 치러지는 중학교 수준의 필기시험과 면접 역시 쉽지 않은 관문이다.



    그러나 어렵게 시민권을 얻은 외국인들, 특히 제3세계 출신 귀화자들은 한국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를 높인다. 귀화했지만 사회적인 시선이나 대우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 법적으로만 국민이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받는 차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이다.

    취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강씨만이 아니다. 귀화한 후에도 예전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파키스탄 출신의 모하메드 카심칸씨(30)는 원서조차 내기 힘들었다. “외국인을 구하는 게 아니다”며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던 것. 아내 하종심씨(28)는 남편의 마음에 난 상처가 걱정이다. “원래 속으로 삭이는 성격이라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귀화했나’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카심칸씨는 취업을 아예 포기하고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는 만큼 할랄(halal·이슬람 율법에 맞춰 도살한 고기) 전문음식점을 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 그러나 그것도 만만치는 않았다. 중소기업청에서 창업자금을 빌리는 것에서부터 가게를 얻는 것까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귀화자에게 세를 내주려는 건물주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동산 중개인 역시 꺼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고함이 목까지 차올랐다고 카심칸씨는 말한다.

    이들에게 창업은 모험에 가깝다. 전세금까지 빼서 만든 자금을 날리면 지난 10년간 힘겹게 쌓은 기반이 모두 날아가기 때문. “애 아빠 마음에 한만 남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아내 하씨의 말이다.

    “한국인으로 살며 피눈물 흘려요”
    그에 비하면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는 이준혁씨(32·파키스탄 출신)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귀화하기 전인 96년 겨울 이미 지금 일하고 있는 무역회사에 자리잡았던 것.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TV에 출연한 것을 눈여겨본 고용주의 배려 덕분이었다. 방송국을 통해 ‘우리 회사에서 일하라’고 제의해 온 것. 탄탄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수출 딜러로 일하고 있는 그를 주변에서는 ‘성공한 귀화자’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강민군(6)은 한국에 없다. 귀화하기 전인 96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파키스탄의 할머니에게 보내 귀화한 후에도 데려오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아이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강씨의 말. “당연히 아내는 심하게 반대했죠. 며칠을 눈물로 새우며 싸웠을 만큼. 아내를 설득하는 데 너무 힘들었어요.” 자신을 많이 닮은 아이가 따돌림의 차가운 시선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옆에 없어도 파키스탄에 있는 것이 낫다고 강씨는 말한다. “아이가 좀더 자라면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 보낼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귀화자의 아들로 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죠.”

    이씨는 한국의 귀화 관련 법률에 맹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결혼하면 F1비자(가족방문 비자)를 받습니다. 이 비자로는 취업이 금지돼 있어요. 그러면서도 3000만원의 재산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고국에서 엄청난 재산가가 아니었다면 불법으로 취업하는 수밖에 없죠. 그러다 적발되면 강제 추방이고요. 무분별한 귀화를 막기 위해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가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합리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귀화 3년차인 광주광역시의 정혁철(40·가명·파키스탄 출신), 정순희씨(39·가명) 부부. 그녀는 “귀화자와 가족이 느끼는 어려움은 결국 자신들이 나서서 푸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변하기를 기대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얘기였다. “움츠러들면 안 됩니다. 스스로 당당해져야죠. 우리는 길을 걸을 때면 일부러 딸아이까지 셋이 손을 꼭 붙들고 나섭니다. 얼마나 화목한 가정인지 과시하는 거예요.”

    그러나 곧 유치원에 들어가는 딸에 대한 걱정은 지울 수가 없다. “분명히 한계가 있겠죠. 백인 혼혈과는 또 다르고요.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잘 자랄 수 있을지 염려가 앞섭니다.” 정씨는 더 이상 어렵다는 판단이 들면 친척들이 자리잡고 있는 영국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어렵게 취득한 국적을 버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부천의 카심칸씨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토로다. 귀화시험 자리에서는 면접관에게 “한국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귀화를 결심했다”고 대답했지만 지금은 회의를 느낀다는 것. 두 사람은 기회가 닿으면 다른 나라로 다시 이민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귀화를 했다는 건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보증한 거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죠?” 우리나라에서 겪는 고통을 감수한다면 전 세계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하종심씨의 말이었다. 감정이 북받친 하씨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 남편 카심칸씨도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한국에서 살겠다는 애초의 결심이 결국 ‘이룰 수 없는 짝사랑’으로 판명난 데 대한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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