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5년 9월 금융가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별다른 인사 요인이 없는데도 몇몇 은행 지점장과 행원들이 서울 양재동 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이들이 떠난 지점에서는 뭉칫돈이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후임 지점장들은 예금 수신액 때문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95년 9월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중앙정보부 때부터 둥지를 틀어온 남산(국내 보안)-이문동(해외) 분리 청사(廳舍) 시대를 마감하고 내곡동 통합 신청사를 마련해 막 이사를 한 시점이었다. 그러니 흥미로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 특히 J은행 S지점의 사례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이었던 S지점장 또한 별다른 인사 요인이 없는데도 내곡동과 가까운 양재동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이 지점장이 발령이 나자 무려 300억원쯤 되는 거액이 지점장을 따라 양재동으로 옮겨갔다. 물론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전에도 인사발령이 날 때마다 거액의 뭉칫돈이 따라 움직이곤 했는데 양재동 지점 발령으로 그 은행원을 따라 움직이는 돈의 전주(錢主)가 어렴풋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례는 그것이 비밀 예산이든 이른바 통치자금이든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맡아 관리하는 돈이 얼마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관리되는지 잘 보여준다. 정보도 마찬가지지만 돈도 여러 사람 손을 타다 보면 비밀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 따라서 고객(안기부)도 믿을 만한 단골 은행원을 선호하지만 은행 또한 이 고객만큼은 특별 관리해준다.
안기부 예산안은 그 자체가 2급비밀이다. 따라서 안기부 돈은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극소수만이 관리한다. 과거의 경우 안기부 재무관인 운영차장(현 기조실장)이 그 휘하에 지출관과 예산관이라는 기구(실제로는 각 1명)를 두고 직접 예산을 관장했다. 현재는 공식 계선조직에 예산 관련 부서를 두어 예산 지출 시스템이 엄격해졌다지만 예산의 명세는 여전히 극소수만이 파악할 뿐이다.
94년 6월 형식상으로나마 안기부 예산을 감사할 수 있는 국회 정보위가 생기기 전까지 안기부는 자체 회계결과 검사보고를 대통령에게만 했다. 지금도 정보위 예산보고 때면 정보위에 참석한 국정원 부서장들은 슬며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국정원을 감독하는 정보위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별로 나을 것도 없다. 국정원 예산은 정보위 회의실 안에서만 심의할 뿐 그 내용을 밖에 알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기부 예산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 선거자금 유입 사건을 둘러싼 여야 공방의 핵심은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및 96년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에 지원된 1192억원의 출처다. 검찰과 여권은 이 가운데 옛 남산 청사 매각대금 9억원을 뺀 1183억원 전액이 안기부 공식 예산(예비비)이라고 주장한다. 검찰은 안기부 예산으로 국고수표를 발행해 돈세탁을 거쳐 신한국당에 지급한 것 등을 근거로 이 사건을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막대한 국가 예산을 불법 횡령하여 특정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국고 횡령 사건”(영장 기재사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당시 선거자금을 총괄한 강삼재 의원(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부인(否認) 발언과 안기부 예산의 규모 등을 근거로 결코 안기부 예산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안기부 돈 일부와 구여권(YS)의 정치자금이 섞인 것’이라는 어정쩡한 반박이다. 한나라당 일부에서는 YS의 92년 대선 잔금이나 당선 축하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당선자에게 거액의 당선 축하금을 건넸다는 설과 모그룹이 거액의 당선 축하금을 건넸다는 설이 있다). YS의 정치자금을 김기섭 전 운영차장이 안기부 예산에 포함시켜 관리해오다 15대 총선 때 썼다는 얘기다.
이처럼 여야는 물론, 야권 내에서도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안기부 예산이 갖는 비밀성과 정보위에 보고되는 일반회계(본예산)보다 각 부처에 분산-은닉된 예비비의 규모가 훨씬 더 큰 안기부 예산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다. 따라서 안기부 예산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무지 혹은 국면을 호도하기 위한 억지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줄곧 안기부 예산 유입 사실을 부인해온 한나라당 주장의 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나라당은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이 국회 정보위 자료실에 비치된 당시 안기부 예산 관련 자료를 확인한 결과, 안기부 세입-세출예산이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월14일 주요당직자 회의에서도 김기배 사무총장은 “정창화-정형근 의원 등 우리당 정보위원들이 정보위 자료실에서 분석한 결과 지난 95년과 96년의 안기부 세입-세출예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며 “그러니 안기부 자금이나 국고를 썼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난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얼른 듣기에도 의문이 남는다. 한나라당측은 안기부가 국회 정보위에 제출하는 결산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주장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한나라당이 집권했던 시절 구안기부 수뇌부의 ‘양심’을 믿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 사용명세가 어떻든 세입-세출조차 일치시켜 놓지 않은 ‘허술한 결산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정부 부처가 있다는 말일까.
한나라당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모순도 보인다. 한나라당은 안기부 재무관인 김기섭 전 운영차장이 서명날인해 국회에 보고한 결산보고서는 조작이 아닌 진실로 믿으면서,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고 시인한 김씨의 고백은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마침내 1월14일 ‘안기부 예산 신한국당 유입설이 허위인 근거자료’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1995년도 안기부 예산의 사용명세를 확인한 결과 안기부 선거자금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금을 만들어 야당을 탄압하려는 명백한 정치공작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의 사실 여부에 앞서, 안기부 예산의 세입-세출 명세가 대강이나마 공개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안기부 예산안은 그 자체가 비밀이다.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도 이 점이 찜찜한지 근거자료를 공개하면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정보’라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국정원(안기부) 예산안은 정보위원들만 열람할 수 있고, 정보위원들은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게 돼 있다.
어쨌든 권철현 의원이 공개한 1995년도 안기부 예산의 사용명세에 따르면 95년 안기부 예산은 본예산 1670억원, 예비비 3250억원 등 총 4920억원이다. 이 가운데 지출명세는 △인건비(56%)와 기관운영비(5%)를 합친 경상비 3000억원(61%) △해외-과학-국내보안 정보비, 지부운영비, 교육-홍보비 등 사업비 1600억원(32.5%) △보험료, 연금보조비 등 국가부담금 120억원(2.4%) △기타 200억원(4.1%) 등으로 총 4720억원은 사용처가 확정돼 있고 사용처가 불명확한 것은 200억원뿐이어서 경상비가 대부분인 일반회계예산에서 1183억원을 빼돌렸다는 검찰의 주장은 날조라는 것이다.
안기부(국정원) 예산은 국회 정보위에 보고되는 연간 2000억원대의 경상비와 재경원(기획예산처), 국방부, 행자부 등 9개 부처 예비비에 분산-은닉된 수천억원 등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뉜다. 경상비의 대부분은 인건비고 예비비는 대부분 사업-공작 활동비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이 지출명세라며 공개한 해외정보비와 과학정보비는 물론 예전부터 각각 ‘203 특수활동비’와 ‘204 업무추진비’ 같은 명목으로 다른 부처 예비비에 은닉-책정해온 비밀예산이다.
안기부는 국회 정보위가 설치된 이후 총예산의 3분의 1은 본예산으로 책정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예비비로 분산-은닉해왔다. 대항목까지 보고하는 본예산(경상비)에 대한 정보위 심의에서는 깎일 염려가 없지만 총액으로 보고하는 예결위 심의에서는 예산이 깎일 경우에 대비해서다. 특정 사업-공작비 같은 세부 항목으로 넣을 경우 예결위 계수조정 과정에서 무산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검찰은 안기부가 예비비에서 매달 30억∼40억원씩 빼내 1000억원대의 예산을 신한국당에 건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박순용 검찰총장은 이미 1월8일 기자간담회에서 “선거 지원금은 대부분 예비비에서 조성되었고 소액의 안기부 일반회계 등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검찰은 안기부가 정보위에 보고한 2000억대의 경상비에서 돈을 빼냈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정보위에 보고된 경상비만 확인하고서 그 결과 예산 유용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와 같은 ‘근거자료’를 근거로 “검찰의 주장은 허위이며 강삼재 부총재의 ‘안기부 예산은 한 푼도 선거자금으로 받은 적이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확신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검찰 발표에 따르면 검찰은 안기부 예산임을 입증하기 위한 관계자들의 진술은 물론 안기부 지출관이 발행한 국고수표와 안기부가 재경부에 요청한 예비비 지급요구서 그리고 재경원 관계자가 발행한 국고수표를 증거로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은 김기섭 전 운영차장과 기조실 관계자들이 구여권에 지원된 자금은 모두 예산이었음을 시인했고, 안기부가 1192억원의 예산 지출 명세를 허위로 작성해 만들어둔 근거자료도 일부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결국 검찰이 2급비밀인 안기부 예산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안기부 예산을 샅샅이 들여다본 검찰과 대강을 들여다 본 한나라당의 대결구도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하다.
95년 9월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중앙정보부 때부터 둥지를 틀어온 남산(국내 보안)-이문동(해외) 분리 청사(廳舍) 시대를 마감하고 내곡동 통합 신청사를 마련해 막 이사를 한 시점이었다. 그러니 흥미로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 특히 J은행 S지점의 사례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이었던 S지점장 또한 별다른 인사 요인이 없는데도 내곡동과 가까운 양재동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이 지점장이 발령이 나자 무려 300억원쯤 되는 거액이 지점장을 따라 양재동으로 옮겨갔다. 물론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전에도 인사발령이 날 때마다 거액의 뭉칫돈이 따라 움직이곤 했는데 양재동 지점 발령으로 그 은행원을 따라 움직이는 돈의 전주(錢主)가 어렴풋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례는 그것이 비밀 예산이든 이른바 통치자금이든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맡아 관리하는 돈이 얼마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관리되는지 잘 보여준다. 정보도 마찬가지지만 돈도 여러 사람 손을 타다 보면 비밀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 따라서 고객(안기부)도 믿을 만한 단골 은행원을 선호하지만 은행 또한 이 고객만큼은 특별 관리해준다.
안기부 예산안은 그 자체가 2급비밀이다. 따라서 안기부 돈은 밖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극소수만이 관리한다. 과거의 경우 안기부 재무관인 운영차장(현 기조실장)이 그 휘하에 지출관과 예산관이라는 기구(실제로는 각 1명)를 두고 직접 예산을 관장했다. 현재는 공식 계선조직에 예산 관련 부서를 두어 예산 지출 시스템이 엄격해졌다지만 예산의 명세는 여전히 극소수만이 파악할 뿐이다.
94년 6월 형식상으로나마 안기부 예산을 감사할 수 있는 국회 정보위가 생기기 전까지 안기부는 자체 회계결과 검사보고를 대통령에게만 했다. 지금도 정보위 예산보고 때면 정보위에 참석한 국정원 부서장들은 슬며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국정원을 감독하는 정보위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별로 나을 것도 없다. 국정원 예산은 정보위 회의실 안에서만 심의할 뿐 그 내용을 밖에 알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기부 예산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 선거자금 유입 사건을 둘러싼 여야 공방의 핵심은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및 96년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에 지원된 1192억원의 출처다. 검찰과 여권은 이 가운데 옛 남산 청사 매각대금 9억원을 뺀 1183억원 전액이 안기부 공식 예산(예비비)이라고 주장한다. 검찰은 안기부 예산으로 국고수표를 발행해 돈세탁을 거쳐 신한국당에 지급한 것 등을 근거로 이 사건을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막대한 국가 예산을 불법 횡령하여 특정정당의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국고 횡령 사건”(영장 기재사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당시 선거자금을 총괄한 강삼재 의원(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부인(否認) 발언과 안기부 예산의 규모 등을 근거로 결코 안기부 예산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안기부 돈 일부와 구여권(YS)의 정치자금이 섞인 것’이라는 어정쩡한 반박이다. 한나라당 일부에서는 YS의 92년 대선 잔금이나 당선 축하금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당선자에게 거액의 당선 축하금을 건넸다는 설과 모그룹이 거액의 당선 축하금을 건넸다는 설이 있다). YS의 정치자금을 김기섭 전 운영차장이 안기부 예산에 포함시켜 관리해오다 15대 총선 때 썼다는 얘기다.
이처럼 여야는 물론, 야권 내에서도 주장이 엇갈리는 것은 안기부 예산이 갖는 비밀성과 정보위에 보고되는 일반회계(본예산)보다 각 부처에 분산-은닉된 예비비의 규모가 훨씬 더 큰 안기부 예산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다. 따라서 안기부 예산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무지 혹은 국면을 호도하기 위한 억지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줄곧 안기부 예산 유입 사실을 부인해온 한나라당 주장의 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나라당은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이 국회 정보위 자료실에 비치된 당시 안기부 예산 관련 자료를 확인한 결과, 안기부 세입-세출예산이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월14일 주요당직자 회의에서도 김기배 사무총장은 “정창화-정형근 의원 등 우리당 정보위원들이 정보위 자료실에서 분석한 결과 지난 95년과 96년의 안기부 세입-세출예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며 “그러니 안기부 자금이나 국고를 썼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난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얼른 듣기에도 의문이 남는다. 한나라당측은 안기부가 국회 정보위에 제출하는 결산보고서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주장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한나라당이 집권했던 시절 구안기부 수뇌부의 ‘양심’을 믿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제 사용명세가 어떻든 세입-세출조차 일치시켜 놓지 않은 ‘허술한 결산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정부 부처가 있다는 말일까.
한나라당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모순도 보인다. 한나라당은 안기부 재무관인 김기섭 전 운영차장이 서명날인해 국회에 보고한 결산보고서는 조작이 아닌 진실로 믿으면서,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고 시인한 김씨의 고백은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마침내 1월14일 ‘안기부 예산 신한국당 유입설이 허위인 근거자료’라는 보도자료를 내고 “1995년도 안기부 예산의 사용명세를 확인한 결과 안기부 선거자금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자금을 만들어 야당을 탄압하려는 명백한 정치공작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의 사실 여부에 앞서, 안기부 예산의 세입-세출 명세가 대강이나마 공개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안기부 예산안은 그 자체가 비밀이다. 한나라당 권철현 대변인도 이 점이 찜찜한지 근거자료를 공개하면서 ‘개인적으로 수집한 정보’라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국정원(안기부) 예산안은 정보위원들만 열람할 수 있고, 정보위원들은 이를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게 돼 있다.
어쨌든 권철현 의원이 공개한 1995년도 안기부 예산의 사용명세에 따르면 95년 안기부 예산은 본예산 1670억원, 예비비 3250억원 등 총 4920억원이다. 이 가운데 지출명세는 △인건비(56%)와 기관운영비(5%)를 합친 경상비 3000억원(61%) △해외-과학-국내보안 정보비, 지부운영비, 교육-홍보비 등 사업비 1600억원(32.5%) △보험료, 연금보조비 등 국가부담금 120억원(2.4%) △기타 200억원(4.1%) 등으로 총 4720억원은 사용처가 확정돼 있고 사용처가 불명확한 것은 200억원뿐이어서 경상비가 대부분인 일반회계예산에서 1183억원을 빼돌렸다는 검찰의 주장은 날조라는 것이다.
안기부(국정원) 예산은 국회 정보위에 보고되는 연간 2000억원대의 경상비와 재경원(기획예산처), 국방부, 행자부 등 9개 부처 예비비에 분산-은닉된 수천억원 등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뉜다. 경상비의 대부분은 인건비고 예비비는 대부분 사업-공작 활동비로 보면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이 지출명세라며 공개한 해외정보비와 과학정보비는 물론 예전부터 각각 ‘203 특수활동비’와 ‘204 업무추진비’ 같은 명목으로 다른 부처 예비비에 은닉-책정해온 비밀예산이다.
안기부는 국회 정보위가 설치된 이후 총예산의 3분의 1은 본예산으로 책정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예비비로 분산-은닉해왔다. 대항목까지 보고하는 본예산(경상비)에 대한 정보위 심의에서는 깎일 염려가 없지만 총액으로 보고하는 예결위 심의에서는 예산이 깎일 경우에 대비해서다. 특정 사업-공작비 같은 세부 항목으로 넣을 경우 예결위 계수조정 과정에서 무산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검찰은 안기부가 예비비에서 매달 30억∼40억원씩 빼내 1000억원대의 예산을 신한국당에 건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박순용 검찰총장은 이미 1월8일 기자간담회에서 “선거 지원금은 대부분 예비비에서 조성되었고 소액의 안기부 일반회계 등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검찰은 안기부가 정보위에 보고한 2000억대의 경상비에서 돈을 빼냈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정보위에 보고된 경상비만 확인하고서 그 결과 예산 유용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와 같은 ‘근거자료’를 근거로 “검찰의 주장은 허위이며 강삼재 부총재의 ‘안기부 예산은 한 푼도 선거자금으로 받은 적이 없다’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확신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검찰 발표에 따르면 검찰은 안기부 예산임을 입증하기 위한 관계자들의 진술은 물론 안기부 지출관이 발행한 국고수표와 안기부가 재경부에 요청한 예비비 지급요구서 그리고 재경원 관계자가 발행한 국고수표를 증거로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은 김기섭 전 운영차장과 기조실 관계자들이 구여권에 지원된 자금은 모두 예산이었음을 시인했고, 안기부가 1192억원의 예산 지출 명세를 허위로 작성해 만들어둔 근거자료도 일부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결국 검찰이 2급비밀인 안기부 예산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전모를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안기부 예산을 샅샅이 들여다본 검찰과 대강을 들여다 본 한나라당의 대결구도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