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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대 특파원의 중국 차세대 지도자 열전|(23) 쑨정차이(孫政才)

농업개혁 중책 짊어진 ‘옥수수 박사’

6세대 선두주자 최연소 장관급 간부 … 식량 생산 제고 8대 목표 제시

  •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농업개혁 중책 짊어진 ‘옥수수 박사’

농업개혁 중책 짊어진 ‘옥수수 박사’
2006년 12월29일 중국 농업부 수장에 전격 기용된 쑨정차이(孫政才·45·사진) 농업부장은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선두주자 가운데 하나다.

현재 6세대 선두주자로는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 성장과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가 있다. 이중 쑨 부장은 루하오 공청단 제1서기를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어린 부장(장관)급 간부다.

쑨 부장의 농업부장 기용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가 식량 증산을 독려하고 중국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결행한 ‘과감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진다. 옥수수 증산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라는 점에서 식량 증산을 획기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볼 수 있지만, 행정을 맡아본 경험이 지금까지 농업부장에 임명된 사람 가운데 가장 짧기 때문이다.

행정경험이 짧아서인지 그에 대한 소개 자료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 중국 관영 신화왕(新華網)에서조차 그의 경력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중국에서 ‘쑨 박사’ 하면 ‘옥수수 밀식(密植) 재배의 대가’로 불린다. 1980년 라이양(萊陽)농학원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1984년 곧바로 베이징(北京)시 농림과학원에 석사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중국 옥수수 재배계의 거두(巨頭)인 천궈핑(陳國平) 교수를 사사했다. 천 교수는 1980년부터 96년까지 베이징시 옥수수 고문단 단장으로 일하면서 베이징시의 1무(畝)당 옥수수 수확량을 1979년 229kg에서 96년 2배가 넘는 481.6kg까지 끌어올렸다.

쑨 부장은 이곳에서 밀생(密生) 옥수수의 생장과정을 집중 연구했다. 똑같은 면적에 많은 옥수수를 심으면서도 그루당 수확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연구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산둥(山東)성 룽청(榮成)시 후산(虎山)진 우룽주이(五龍嘴)촌이다. 이곳은 산둥성에서도 한국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그가 어릴 적의 이 지역 생활수준은 중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열악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중·고교를 다닌 쑨 부장은 주말에 집에 갈 때도 학교에서 모아둔 식량을 짊어지고 집에 갔다가 남들보다 일찍 돌아오곤 했다. 집에 가도 그가 먹을 양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바오 총리의 ‘과감한 모험’

하지만 시험성적은 항상 상위였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반장을 도맡아 했다. 당시 체육을 가르쳤던 장수제(張樹皆) 교사는 2007년 초 ‘웨이하이(威海)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부도 잘하고 어른스러웠으며, 친구들과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어린이였다”고 그를 회고했다.

그는 현재 우룽주이촌에서 유사 이래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1980년 고등학교 졸업 땐 그를 비롯한 3, 4명만이 대학에 들어갔다.

석사 연구생 시험을 앞두고 그는 일주일 열흘씩 쉰다는 춘제(春節)에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그 혼자뿐이어서 추위 때문에 외투를 입고 담요로 몸을 감싼 채 공부했다고 그의 대학동료들은 전했다.

그가 옥수수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시절 지도교수의 엄한 질책이 큰 밑거름이 됐다.

라이양농학원 재학 시절 밀품종 실험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실험밭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분필이 없어졌던 것. 이미 실험밭은 밀을 심느라 모두 갈아엎은 상태였다. 보통 교수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교수는 달랐다. 분필이 밀의 발아(發芽)와 생장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러면 실험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분필을 찾아 꺼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는 온종일 진땀을 흘리며 실험밭을 뒤집은 끝에 결국 분필을 찾아냈다.

학자 출신 관료 농업행정 우려 목소리도

그가 옥수수 재배에 조예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 외에도 지도교수의 이런 엄격한 학문연구 태도가 그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든 결과라는 게 그와 10년간 함께 공부한 동료 교수의 전언이다.

최근 발간된 우룽주이촌의 촌지(村誌)는 “보검의 칼날은 스스로 날카롭게 연마할 때 만들어지고, 매화 향기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발하는 것”이라며 “쑨 부장의 성공은 지난한 땀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촌의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적었다.

성실하고도 치밀한 그의 연구 태도는 곧바로 대학 지도교수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베이징시 농림과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년간 영국 유학을 다녀오자마자 농림과학원 작물소 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된 것도 이런 결과다.

이어 1993년엔 30세 나이로 농림과학원 토비(土肥)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농림과학원 부원장을 거쳐 당위 부서기에 올랐다.

1997년은 옥수수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34세이던 그는 농림과학원을 떠나 베이징시 순이(順義)현의 부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대리현장, 현장, 구장을 거쳐 2002년 5월 순이구 당서기 자격으로 베이징시 위원회 상무위원에 당선됐다.

쑨 부장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학자 출신 고위관료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우레같이 맹렬하고 바람처럼 신속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현과 구에서의 경험만 가진 관리로서 천차만별인 중국 농업의 최고 책임자가 된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쑨 부장은 농업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식량 생산 제고 △농민 수입 증대 △농업 자주기술 혁신 △농산품 안전 확보 △농업 서비스 강화 △농촌 개혁개방 심화 △동물 질병 방역 강화 △농민 실질 문제 해결 등 8대 목표를 제시하고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식량 생산량 증가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5년엔 전년보다 1455만t 늘었지만 2006년엔 1309만t, 2007년엔 350만t으로 증가분이 줄었다.

농업이 주력인 중국의 1차산업 연간 성장률 역시 2~6%로 매년 10% 이상씩 고속성장 중인 2, 3차 산업과 큰 차이가 있다.

행정전문가로 10년간 외도하다 다시 자신의 전공 분야로 돌아온 쑨 부장이 중국의 농업개혁이라는 지난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6세대 선두주자의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쑨정차이 프로필

·한족(漢族)

·1963년 9월생

·산둥(山東)성 룽청(榮成) 출신

·1988년 7월 공산당 입당

1987. 5 베이징(北京)시 농림과학원 작물재배 및 경작학 석사 졸업,

        농학박사, 연구원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작물소 연구실 부주임

1993.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토비(土肥)연구소 소장,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연구소 당(黨)지부 서기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부원장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당위 부서기

1997. 중국 공산당 순이(順義)현 위원회 부서기,

        부(副)현장, 대리현장, 현장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순이구 위원회 부서기, 구장

2002. 2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순이구 위원회 서기

2002. 5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2002. 11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시 위원회 비서장

2006. 12~현재 농업부장, 당조(黨組)서기

제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주간동아 2008.06.10 639호 (p56~58)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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