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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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있는 친구 두 놈 거친 남자 변신은 숙명

  • 하재봉 영화평론가

    입력2008-03-26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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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멋있는 친구 두 놈 거친 남자 변신은 숙명

    ‘숙명’의 한 장면. 우민(송승헌 분)은 철중(권상우 분)과 둘도 없는 친구지만 결국 배신당하는 캐릭터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귀여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제목이지만, ‘숙명’ 시사회에 나타난 송승헌과 권상우를 보면서 저절로 이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멋있었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옷차림이었는데도 몸에서 광채가 났다. 그러니 그들의 골수팬들은 오죽할까.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 온 송승헌 팬들은 피켓 등을 들고 시사회장 복도를 가득 메웠다. ‘숙명’은 송승헌의 제대 후 복귀작이기도 하다. KBS 드라마 ‘가을동화’로 한류스타가 된 송승헌이 군에 입대한 후 그를 볼 수 없었던 팬들은, 오직 송승헌 때문에 ‘숙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송승헌의 팬카페 이름도 ‘송승헌은 멋있었다’다.

    송승헌은 1995년 의류브랜드 ‘스톰’의 모델로 데뷔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출연작은 그리 많지 않다. ‘가을동화’(2000) ‘여름향기’(2003) ‘로펌’(2001) 등의 드라마와 영화 ‘카라’(1999) ‘일단 뛰어’(2002) ‘그놈은 멋있었다’ ‘빙우’(이상 2004), 그리고 이번에 개봉하는 ‘숙명’이 거의 전부다. 활동기간에 비하면 그가 연기한 작품은 의외로 적다. 군 입대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과작에 속한다.

    드라마에서의 인기와는 별개로 그의 영화 출연작 가운데 성공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놈은 멋있었다’만 흥행에 성공했을 뿐, 다른 작품들은 흥행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놈은 멋있었다’도 비평 쪽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송승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가을동화’가 한류 바람을 일으킨 이후, 그가 일본 중년 여성팬들의 로망이 되면서 역으로 국내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국내에서는 스타의 이름값에 준하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 특히 군 입대를 둘러싼 잡음과 공백은 그의 활동에 족쇄로 작용했다.

    “‘숙명’을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제대 후 복귀작을 영화로 할지 드라마로 할지 결정하는 게 힘들었다. 영화는 후반작업에 긴 시간이 걸린다. 즉 촬영 후 후반작업을 거쳐 극장에서 대중에게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복귀 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 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로 무난하게 복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송승헌 제대 후 첫 복귀작 화끈한 신고식

    그 자신의 설명처럼, 송승헌은 드라마를 통해 구축한 귀공자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드라마 복귀도 검토했지만 결국은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거친 남성적 이미지를 선택했다. ‘숙명’에서 그가 맡은 김우민이라는 배역은 조폭세계에서 우정을 쌓은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으로 친구 조철중(권상우 분)과 영환(지성 분), 도완(김일권 분)에게 모두 배신당하는 캐릭터다.

    카지노를 습격한 네 친구는 3개의 돈가방 가득 돈을 담고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철중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그 책임을 우민이 뒤집어쓴다. 우민이 2년 동안 복역한 뒤 출소해보니 친구들은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철중이 나이트클럽을 맡아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는 반면, 도완은 마약에 찌들어 있고 영환은 보스의 오른팔 구실을 하고 있다.

    송승헌이 맡은 우민은 그동안 그가 구축해놓은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난 배역은 아니다. 영화 속의 그는 여전히 감성적이고 우수에 가득 차 있으며 젠틀하다. 그가 몸담고 활동하는 곳이 조폭세계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의 주변에는 각목과 쇠파이프가 난무하고 칼이 번뜩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민과 송승헌의 거리가 그렇게 멀거나 상반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숙명’의 거칠고 남성적인 세계는 송승헌의 기존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업그레이드하는 데 분명 장점으로 작용한다.

    “오랜만에 복귀작을 선택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는 도중 숙명처럼 ‘숙명’을 만났다. 김해곤 감독의 영화는 예쁘거나 깔끔하지는 않다. 투박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 냄새가 나고 뭔가 끈끈한 게 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좋겠지만 오랜만에 송승헌이 나왔는데 예전하고 느낌이 다르네, 남자답네, 이렇게만 얘기해줘도 감사할 것 같다.”

    그러나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썼고, ‘달콤한 인생’ ‘라이방’ ‘가문의 위기’ 등에 출연했으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영화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 김해곤 감독은 두 번째 작품인 ‘숙명’을 너무 특징 없이 끌고 나간다. 조폭세계에 몸담은 친구들 간의 우정과 배신이란 소재는 그동안 수없이 접했던 것이고, 개성적인 캐릭터도 만들지 못했으며, 연출 스타일 역시 범속하다.

    영화는 왜 우리가 이렇게 낯익은 이야기를 또 봐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이어진다. 권상우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버럭 성질만 내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송승헌은 멋지게 폼 잡는 폼생폼사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민을 사랑하는 은영 역인 박한별의 존재감도 거의 없다.

    철중 역 맡은 권상우 사뭇 달라진 연기

    “배역을 맡은 후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런데 촬영을 시작하자 감독님은 열이면 열, 내가 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견대립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영화 속 모든 캐릭터와 연관을 맺고 있는 배역이 우민인데,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관계를 설명해주면 영화가 산만했을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이 나를 절제시킨 것 같다.”

    송승헌이 맡은 우민이 내적으로 감정을 응축시키다가 폭발하는 배역이라면, 권상우가 연기하는 철중은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다혈질 캐릭터다. 화가 나면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부하들을 팬다. 영화를 보는 동안 재미있는 장면은 대부분 철중이 나오는 장면이다.

    철중 역을 맡은 권상우의 모습은 기존의 권상우와 사뭇 달랐다. 연기는 힘이 빠지고 자연스러워졌고, 또 유연해졌다. 그가 그려낸 철중은 좌충우돌하면서 실리 위주로 움직이는 영악한 캐릭터다. 다만 문제는 발음이 여전히 부정확하다는 점이다. 배우의 역할 중 첫 번째는 정확한 대사 전달이다. 감정을 앞세워 대사 처리를 불분명하게 한 배우도 잘못이지만 그 상황을 그대로 끌고 간 감독의 책임도 크다.

    김해곤 감독은 “이 배우들은 찢어놔도 안 망가질 외모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외모도 배우의 재능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망가뜨리지 않기로 했다. 두 배우가 한류스타임에도 촬영하는 동안 너무 대우를 안 해준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해곤 감독의 가장 큰 잘못은 꽃미남 배우들을 망가뜨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끌고 가지 못했으며 개성 있는 연출로 자신만의 독창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숙명’은 2000년 이후 쏟아진 조폭 소재의 한국영화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과 개성 없는 캐릭터, 그리고 설득력이 부족한 내러티브 전개는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감만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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