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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잇단 제작 공포영화 해외시장서 각광 … 정서적 한 서린 ‘참신성(?)’에 해외 관객 반한 듯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2004년 한국영화의 주류이자 수출 효자상품이 된 공포영화들. \'분신사바\' \'쓰리 몬스터\' \'페이스\' \'인형사\'(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지난해 ‘장화, 홍련’의 눈부신 성공은 올 여름 한국 영화계의 주•조연 배우들을 귀신으로 채워넣었다. 영화 편수는 이미 작년 수준을 넘어섰고, 멜로와 코미디에도 귀신이 등장한다. 산발한 머리에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말이다. 이미 개봉한 ‘페이스’와 ‘령’ 이후 ‘인형사’와 ‘분신사바’가 뒤를 잇고 있으며 ‘알 포인트’, ‘쓰리 몬스터’, 미스터리 성격이 강한 ‘거미숲’이 대기하고 있다. 여기에 호러 코믹물 ‘시슬리2km’ ‘귀신이 산다’가 여름의 막바지에 개봉되며, 김혜수의 ‘얼굴없는 미녀’에도 몸매 좋은 좀비 귀신이 깜짝 출연한다.

페이스-신현준, 송윤아 주연/ 해골에서 원래 얼굴을 복원하는 일을 하는 남자가 연쇄살인 사건에 얽혀 원혼을 만나게 된다.

령-김하늘 주연/ 물귀신에게 시달리던 주인공 지원은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와 죽은 친구들을 통해 ‘내가 내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인형사-임은경, 김유미 주연/ 구체관절인형의 모델이 되기 위해 한곳에 모인 사람들이 인형 귀신을 만나 한 사람씩 살해된다.

분신사바-김규리, 이세은 주연/ 귀신을 부르는 주문이 실현되면서 30년 전에 죽은 모녀 귀신이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부활한다.



알 포인트-감우성 주연/ 베트남전에서 죽은 군인 귀신들이 여전히 살려달라는 무선신호를 보낸다. 쓰리 몬스터-이병헌 등 주연/ 부인을 살리기 위해 아이를 살해하고, 젊어지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이미 죽은 쌍둥이 언니 귀신이 찾아오는 단편 3부작.

거미숲-감우성 주연/ 역겨운 살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남자가 어린 시절 기억의 터널에서 자신의 악마적 모습과 마주친다.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일본영화 '검은 물 밑에서'와 코드가 같은 '령'.

올 여름 공포영화는 수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비평적으로나 흥행에 대한 기대에서 ‘주류’를 차지한다. 여름이면 끼워넣기식으로 제작되는 B급영화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한국영화에서 공포영화가 큰 몫을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공포영화는 사회구성원들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위기와 혼란을 느낄 때 등장한다’는 게 영화이론이다. 이런 해석으로 본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와 정치적 혼란, 주요 관객층인 청년들의 실업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영화 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공포영화는 사회 혼란 때 등장?

서울시네마테크 사무차장 김수정씨는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불안해도 불안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공포의 원인이 드러나고, 그것을 제거하여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공포영화는 사회적 불안이 ‘흘러갈 수 있는 물길’인 셈이다. 때마침 일어난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은 어느 공포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그는 구체적 원한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부자도 죽였고, 가난한 보도방 여성들도 살해했다. 즉 누구나, 아무 이유 없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유영철 사건의 진정한 공포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종류의 공포는 지난해부터 나온 영화들의 공통적 심리 기제와 맞아떨어진다. 최근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노리는 피해자들은 구체적으로 원한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다. ‘인형사’나 ‘분신사바’의 피해자들은 부모 세대의 잘못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관객들은 원인불명의 현대적 불안을 영화 속에서 해결하고 싶어한다.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한국 영화사에서 공포물을 부활시킨 '구미호'.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공포영화는 혼란한 영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질서로 돌아오고 싶다는 소망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영화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이 이론이 맞는 것은 아니었다.특히 군사독재 치하였던 1970년대와 80년대는 감히 귀신들도 출몰하지 못했다. 60년대 말 ‘월하의 공동묘지’(1967)가 당시 대박영화급인 5만명을 동원하는 등 인기를 누린 것에 비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70년대까지만 해도 귀신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심한 검열과 소재 제한 때문에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공포영화는 외국영화 베끼기에 골몰했고, 나중엔 관객의 눈높이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졸렬해진 귀신과 드라큘라들만 남았다. 이 때문에 80년대 주류 영화감독들은 공포영화를 외면했다. 그러다 새로운 영화와 컴퓨터그래픽 세대의 등장을 알리며 고소영 주연의 ‘구미호’(1994)가 태어났고, 드디어 1998년 박기형이라는 재기발랄한 감독의 ‘여고괴담’이 탄생했다. ‘여고괴담’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여고괴담’과 1999년 개봉된 일본영화 ‘링’은 올해까지도 한국 공포영화의 전형이 되고 있다. 여고생적 감수성의 왕따 귀신이 여전히 복제되고 있으며, “‘링’의 주인공 사다코의 악령이 충무로에 떠돌고 있다”는 비판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의 젊은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에게 공포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 70~80년대의 영화사적 공백과 상대적으로 유리한 제작 조건 때문이다.

‘분신사바’ 300만 달러에 일본 수출

‘분신사바’와 이전의 ‘폰,’ ‘가위’로 공포영화 전문으로 불리는 안병기 감독은 “한국영화들을 살펴보다 공포영화가 빠져 있는 것을 알았고 공포영화로 노하우를 쌓으면 대가의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한다. ‘아카시아’의 제작자 강성규씨는 “뭐든 처음이라는 조건이 성공하기 가장 쉽지 않겠나”라고 말한다. “요즘 대부분 제작자나 감독의 현실적 공포는 캐스팅이다. A급 배우를 캐스팅하려면 배우난도 심하고,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유일하게 스타를 원하지 않는 장르다. 무서운 장치들을 ‘웰 메이드’하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A급 여배우들은 공포영화에 출연해 비명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장화, 홍련’과 ‘여고괴담’이 담당했듯, 이제 공포영화는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 학교가 되었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장점에 더해 최근 한국 공포영화는 세계 영화 관객, 특히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는 수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여고괴담'.

안병기 감독 프리미엄이 붙은 ‘분신사바’는 간단한 줄거리만 갖고 일본에 300만 달러에 팔려나갔고, 한국에선 실패한 같은 감독의 ‘가위’가 최근 개봉돼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10위를 차지했다. 같은 감독의 ‘폰’이 이탈리아에서 개봉돼 아시아 영화로는 처음으로 개봉 첫 주에 2위에 올라, 이탈리아 영화사가 내친김에 ‘분신사바’를 20만 달러에 계약했다. 휴대전화라는 일상적 매체를 끌어와 화제를 모았던 ‘폰’은 일본에서 극장 수익만 100억원에 이르고 미국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사 11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인형사’도 일본에서 ‘장화, 홍련’을 수입했던 콤스탁사에 110만 달러, 스칸디나비아 3국과 태국 등에 20만 달러에 수출했다. 모두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칸 영화제에서 성사된 일이다. 아름다운 영상과 슬픈 이야기로 한국에서도 성공한 ‘장화, 홍련’은 꾸준히 수출 계약이 이뤄져 이미 400만 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400만 달러는 ‘실미도’와 맞먹는 수출액수로 제작비를 감안하면 훨씬 실속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별 재미를 보지 못한 ‘아카시아’도 30만 달러에 수출됐고, ‘거울 속으로’는 미국 주요 영화사인 뉴리젠시에 리메이크 판권을 75만 달러에 팔았다. ‘여고괴담 2-메멘토 모리’는 세계 20개국에 수출됐다.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태국에 갔더니 한국 공포영화 붐이 일어 한국에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하얀방’ DVD가 불티나게 팔리더라”고 전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수출회사인 ‘미로비전’의 서정미 국제부 팀장은 “공포영화가 세일즈하기에 가장 쉽다. 드라마가 약해도 소리와 이미지는 통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영화 관객들, 특히 아시아 영화팬들이 한국 공포영화에 반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공포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와는 다른 차원이다. 영화 관계자들의 공통된 분석은 “최근 한국 귀신들이 상당히 참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고괴담’ 직후 만들어진 공포영화들은 ‘가위’ ‘하피’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등 할리우드의 잔혹한 살육영화 ‘슬래셔’를 흉내낸 것들이었는데, 결과가 참담했다. 그러자 제작자들은 다시 배신당한 원혼, 정서적 한이 서린 전통적인 한국 귀신을 불러냈는데, 이런 소재가 아시아 관객들에게는 익숙함과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교도나 살인마, 괴물 귀신만 보던 서양에서는 신비스런 느낌을 주었다. 싱크대 귀신, 학교 귀신, 물 귀신, 화장실 귀신 등 일상적인 귀신은 동양 관객들에게는 늘 잠재된 공포의 대상이고 서양에선 이국적인 존재다.

한국 귀신들 “국내 무대는 좁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공포물 '알 포인트'의 거리홍보 행사.

“작품성 떨어져도 마구잡이 수입” “‘장화, 홍련’은 전설이나 동화 같은 옛날이야기에 국적불명의 공간을 더해 관객들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린다. 동시에 젊고 세련된 관객들의 눈도 만족시킨다. ‘여고괴담’도 동양권에선 공통적인 경험이고, ‘거울 속으로’는 모던한 공포를 거울이라는 일상적 물건과 결합해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거울 속으로’ 제작자 김은영) 또한 미로비전의 서팀장은 “일본 귀신이 개인적 원한을 갖고 있다면 한국 귀신들은 사회적 희생자란 점이 일본에선 새롭게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동양적 귀신에 대한 공포를 새로운 소재나 형식으로 업그레이드해 한국적 귀신의 전형이 태어나게 됐다. ‘여고괴담’류의 학원 폭력, ‘폰’의 전화, ‘거울 속으로’의 거울, ‘인형사’의 구체관절인형 등이 한국 공포영화의 아이디어 면에서 ‘진보’인 셈이다.

그러나 올해 ‘페이스’와 ‘령’은 비평적으로나 흥행성적에서 실패했다. ‘인형사’와 ‘분신사바’도 비평가들에게서 냉담한 반응을 얻고 있다. “공포영화는 보이는 현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속성상 반체제적이며 진보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공포영화는 지나간 과거, 여고시절의 후일담, 옛날이야기다. 관객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만 보고 싶어한다. 현재의 진짜 공포와 맞닥뜨리기조차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공포영화들은 매우 보수적이다.”(김수정) 그뿐 아니라 현재 공포영화들이 점점 더 드라마를 망각하고 ‘손톱 긁는 소리’와 ‘겅중거리는 머리 푼 귀신, 사다코’에 의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는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공포영화의 생명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일이다.

비록 지금 수출이 잘되고 있긴 하지만 해외 영화팬들이 금세 한국 귀신에 식상하지 말란 법도 없다. 액션영화 수출로 좋은 시절을 누렸던 홍콩 시장의 고사가 그 나쁜 본보기다. 일본 영화계를 잘 아는 이들은 “한국 공포영화가 잘되니 일본 영화업자들이 뒤늦게 작품성이 떨어지는 공포영화들까지 마구잡이로 수입해 상영한다. 돈 준다는데 수출 안 할 수도 없겠지만, 길게 봐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라고 우려한다. “일본 수입업자들이야 한국 공포영화가 안 되면 다른 나라 영화를 수입하러 떠나겠죠. 한국 공포영화도 부침이야 피할 수 없겠지만 그 속도를 늦추고 폭을 줄이려면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이 더욱 참신한 아이디어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화 관객은 싫증을 잘 내니까요. 공포영화도 예외는 아닙니다.”(미로비전 서정미 팀장)





주간동아 2004.08.12 447호 (p62~64)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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