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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에이스 시대의 종말이 온다

1이닝 선발부터 벌떼 불펜까지 다양해지는 투수 운용 방식

선발 에이스 시대의 종말이 온다

미국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의 마무리투수 세르히오 로모. 
[동아DB]

미국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의 마무리투수 세르히오 로모. [동아DB]

‘이후의 과학 이론들은 그것들이 적용되는 흔히 상당한 차이가 나는 환경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이전의 것들보다 더 좋은 이론이 된다. 이는 상대주의자의 입장이 아니며, 그것은 내가 과학의 진보를 확신하는 신봉자라는 의미를 드러낸다.’(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 알듯 말듯 한 이야기를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올해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마운드 운용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는 팀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탬파베이 레이스. 

탬파베이는 로스앤젤레스(LA) 에인절스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치른 7월(이하 현지시각) 마지막 경기에서 라인 스타넥(27)에게 선발 마운드를 맡겼습니다. 스타넥은 1회를 무실점으로 막은 뒤 2회부터 라이언 야브로(27)에게 마운드를 넘겼습니다. 스타넥이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건 이날이 올해 16번째지만 한 번도 2이닝 넘게 던진 적이 없습니다. 

올해 탬파베이에서는 이렇게 선발투수가 3회도 되기 전 마운드를 내려오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선발투수 평균 투구 이닝(4.3이닝)은 메이저리그 30개 팀 가운데 최하위입니다. 이 부문 29위인 토론토 블루제이스 기록이 5.3이닝이니까 나머지 팀과 차이도 적잖습니다.


‘오프너 시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렇다고 이 팀 선발투수 기록이 나쁜 건 또 아닙니다. 탬파베이 선발진은 5월 19일 이후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는 두 번째,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제일 좋은 평균 자책점(3.39)을 기록 중입니다. 그런데도 선발투수를 이렇게 빨리 내리는 이유가 뭘까요. 

5월 19일을 기준으로 삼은 건 이날이 탬파베이가 실험을 시작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탬파베이는 이날 LA 에인절스를 상대로 원래 팀 마무리투수인 세르히오 로모(35)를 선발투수로 내세웠습니다. 이전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588경기에 모두 구원 등판했던 로모는 1회를 무실점으로 막은 뒤 마운드에서 물러났습니다. 로모는 이튿날 또 선발 등판했고 이번에는 1과 3분의 1이닝을 실점 없이 막았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전날 경기 때 공을 몇 개 던지지 않은 상태에서 퇴장당하거나 비가 오래 내려 마운드에서 물러난 경우가 아닌데도 이틀 연속 선발 등판한 건 1980년 14, 15일 스티브 맥캐티(64·당시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이후 로모가 38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로모가 ‘위장 선발투수’였던 건 아닙니다. 케빈 캐시(41) 탬파베이 감독은 이 경기 전 이미 로모를 짧게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였습니다. 캐시 감독은 이후에도 7월까지 64경기를 치르는 동안 총 25번(39.1%)에 걸쳐 선발투수를 이런 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선택 근거는 1회에 점수가 제일 많이 난다는 ‘빅데이터’였습니다. 1973년 메이저리그가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이후 1회에 평균 0.56점이 나왔습니다. 거꾸로 9회는 가장 적은 0.44점입니다. 9회에 구위가 좋은 마무리투수가 나와서 그런 것 아니냐고요? ‘1이닝 마무리투수’는 1988년이 돼서야 등장했기 때문에 대세를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1회에 점수가 제일 많이 나는 이유도 간단합니다. 각 팀 감독이 득점을 많이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짠 타순이 그대로 나오는 유일한 이닝이니까요. 10개 구단 체제로 바뀐 2015년부터 올해 7월까지 한국 프로야구 기록을 따져봐도 1회(0.67점)에 평균 득점이 가장 많고 9회(0.52점)가 가장 적습니다. 그렇다면 1회를 무실점으로 막는 게 9회를 무실점으로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네트워크 소속 스포츠 캐스터이자 세이버메트리션(야구통계학자)인 브라이언 케니는 이런 통계를 바탕으로 지난해 ‘어헤드 오브 더 커브(Ahead of the Curve)’라는 책을 펴내면서 ‘1회 또는 2회까지 무실점으로 막는 걸 목표로 하는 새로운 투수 포지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포지션에 ‘오프너(Opener)’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마무리투수를 클로저(Closer)라고 부르는 데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책에서만 존재하던 오프너가 실제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은 건 5월 19일 로모가 처음입니다. 

오프너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개념으로 ‘불펜 데이’도 있습니다. 오프너 다음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메인이벤트 피처’는 원래 선발투수가 그런 것처럼,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반면 불펜 데이 때는 문자 그대로 선발 자원이 아예 등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불펜투수 여러 명이 경기를 나눠 맡습니다. 이때 제일 먼저 등판하는 투수는 보통 타순이 두 바퀴 정도 돌 때까지 마운드에서 버티는 게 목표입니다. 

올해 탬파베이가 불펜 데이로 경기를 치른 건 19번(29.7%)입니다. 그러니까 탬파베이는 5월 19일 이후 64경기를 치르는 동안 44번(68.8%)에 걸쳐 오프너 또는 불펜 데이로 마운드를 운용한 셈입니다.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기술

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선전을 다룬 영화 ‘머니볼’은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동아DB]

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선전을 다룬 영화 ‘머니볼’은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동아DB]

탬파베이에서 이런 전술을 채택한 이유는 팀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올해 탬파베이 연봉 총액(약 7432만 달러·약 831억7100만 원)은 뒤에서 두 번째고, 투수진 연봉(약 1252만 달러·약 140억1100만 원)만 비교하면 아예 최하위입니다. 탬파베이는 이런 상황에서 남들처럼 선발 로테이션을 운영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2000년대 초반 오클랜드가 남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출루율에 주목한 이유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성공기를 다룬 책 ‘머니볼’에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기술(The Art of Winning an Unfair Game)’이라는 부제가 붙은 건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탬파베이의 새로운 기술이 통했을까요. 이건 좀 판단하기 애매합니다. 5월19일 이후 탬파베이는 33승31패(승률 0.516)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오프너를 쓰거나 불펜 데이로 치른 44경기에서는 21승23패(승률 0.477)에 그쳤습니다. ‘남들이 하던 대로’ 마운드를 운영했을 때가 12승8패(승률 0.600)로 승률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도 탬파베이는 얻은 게 더 많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캐시 감독은 “(오프너 또는 불펜 데이 때 선발로 나선 투수가) 기대에 못 미쳤을 때는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속이 뒤틀리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신인 투수 7명이 도합 40번 동안 선발 마운드에 올라 상대 팀 최고 타자들을 상대하는 기회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쌓게 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야구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1이닝 마무리투수’가 등장한 건 30년밖에 되지 않은 일입니다. 당장 올해 탬파베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이 전술로 성공한다면 오프너나 불펜 데이가 당연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선발투수라면 최소한 5이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구식으로 보이는 날이 찾아온다 해도 놀라지 마세요.




주간동아 2018.08.08 1150호 (p62~63)

  •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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