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6일 검찰에 소환된 김운용 IOC 부위원장.
체육계의 거목(巨木)이 마침내 쓰러졌다. 후계자를 기르지 않은 채 이뤄진 ‘1인 왕국’의 붕괴는 한국 스포츠 외교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거목의 추락은, 측근들마저 등을 돌린 김운용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개인뿐만 아니라 향후 10년 이상 스포츠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일대 사건이다. 김운용이 어떤 인물인가. 연이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스포츠계에서의 입지를 바탕으로 영향력을 유지해왔던 야누스적 존재 아니었던가. 비록 연거푸 터진 스캔들로 인해 수숫대 꼭대기에 앉은 잠자리 신세였지만 그가 이처럼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한 이는 많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 없어 ‘혹독한 대가’
IOC 내의 반(反)김운용 정서로 미뤄볼 때 IOC로부터도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은 김부위원장이 허물 못지않은 공을 세웠다는 동정론도 없지 않다. 부패 혐의의 유ㆍ무죄 여부는 법원 판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 스포츠 외교를 빈껍데기로 만들어놓았다는 비난만은 피할 수 없다. 체육계 인사들은 그가 한국 스포츠계에 끼친 가장 큰 잘못은 2인자는커녕 세계 무대에 얼굴을 내밀 만한 일꾼을 단 한 명도 키우지 않은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30여년간 한국 체육계의 대부로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그에게 ‘2인자’라는 말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단어였다는 게 체육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요즘 김부위원장의 주변엔 사람이 별로 없다. 가까웠던 인사들도 그의 등에 비수를 꽂고 있는 형국이다. 그가 사람을 키우지 않은 탓에 국내 체육계에서의 입지가 생각보다 허약한 까닭이다. 체육계 인사들은 반(反)김운용을 외치는 비토 세력이 세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클 만한 사람들의 싹을 잘라내고 부리기 쉬운 사람들만 끌고 다니며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2인자의 등장을 철저하게 경계해왔다. 돋보이면 잘라내버리는 독재권력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인 것. 김부위원장의 힘의 원천과 추락의 원인은, 모두 2인자를 용납하지 않은 1인 독주에서 기인했다는 게 체육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김부위원장의 절대권력이 처음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솔트레이크 스캔들’(김부위원장의 아들 정훈씨가 1998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유치에 때맞춰 조직위에 취직한 사건)이 불거졌을 즈음이다. 그의 측근으로 불렸던 한 체육계 인사는 “솔트레이크 스캔들 이후 김부위원장을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고위관계자 역시 “솔트레이크 스캔들 이후부터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해 대한체육회장에서 물러난 뒤로 김부위원장은 사실 국내에선 주변부에 머물렀다”고 전했다. 부패 혐의가 드러나기 전 김부위원장의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방해 의혹이었다. 사실 여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평창 논란이 불거진 것도 IOC부위원장에 당선됨으로써 흔들리기 시작한 ‘1인 체제’를 공고히 하겠다는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김부위원장에게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하야 압력까지 받던 김부위원장은 2001년 IOC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배수진을 쳤다고 한다. 위원장 선거에서 지면 해외활동에 주력하며 국내에선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겠다는 요지의 각서를 민주당 C의원 등에게 써줬다는 것. 그러나 김부위원장은 낙선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후 그는 태권도학계의 교수 및 학생들로부터 공격을 당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직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수모를 겪는다. 체육계 사정에 정통한 대학교수 A씨는 “김부위원장이 약속을 지키고 자발적으로 물러난 뒤 뒤늦게라도 후진 양성에 나섰더라면 존경받는 체육인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김부위원장의 퇴장과 관련해 일각에선 ‘삼성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난해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차기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한 IOC총회에서 평창이 선전할 수 있었던 데는 삼성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음모론은 프라하 총회 직전 김부위원장이 삼성측을 겨냥한 듯 “패션쇼나 열고 거리에서 음악회를 해봤자 쓸데없이 돈만 들지 무슨 소용이 있나. 실제 표를 행사하는 IOC위원의 마음을 움직일 사람은 나뿐이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삼성측이 분노했다는 후문이 나돌면서 불거진 것. 이 같은 발언이 이건희 IOC 위원을 겨냥한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김부위원장은 이 발언을 통해 능력 있는 또는 영향력 있는 인사를 전혀 키우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됐다.
전문가들은 김부위원장이 2인자, 더 좁혀서 측근조차 제대로 키우지 않은 탓에 앞으로 적어도 10년, 길게는 20년 동안 한국 스포츠 외교가 허우적거리게 됐다고 지적한다. 이용식 체육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스포츠 외교에 나서려면 외국어, 특히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부단히 국제행사에 참석해 얼굴을 알려야 하는데 이는 5, 6년에 되는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안민석 중앙대 교수(스포츠사회학)는 “김부위원장은 한국 스포츠계의 계륵이었다”고 전제한 뒤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이라 충격은 상당히 오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태권도의 경우는 사정이 더 심각하다. 김부위원장이 자신의 1인 권력 유지에 치중해 세계태권도연맹(WTF)에는 한국인을 포함해 5명의 부총재가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일부에서 최홍희 총재 사망 이후 빠르게 몰락한 국제태권도연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올해 열리는 아테네 올림픽을 끝으로 퇴출 압력을 받고 있는 태권도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한 중국이 개최지 프리미엄을 디딤돌로 로비를 벌이고 있어 우슈에 밀려 퇴출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향후 과제는 `‘포스트 김운용’ 시대를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모아진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김부위원장이 배타적인 왕국을 건설하고, 정부가 이를 방조함으로써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전무’하다는 것.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한국은 ‘경기력’에 비해 ‘외교력’이 크게 떨어진다. 현재 IOC 내에서 공식 직책을 갖고 활동 중인 한국인은 장주호 생활체육분과위원, 김철주 올림픽기념품수집분과위원, 전이경 선수분과위원 등 3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들이 맡고 있는 직책은 IOC 내에서 한직이나 다름없는 ‘생색내기용 자리’라는 평이다. 이건희, 박용성 IOC위원이 있지만 기업인인 이들 역시 스폰서 기업인, 경기단체(국제유도연맹)의 장으로 알려져 있을 뿐 IOC 내에서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다.
포스트 김운용 시대를 나름대로 준비해온 인사 역시 윤강로 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공동사무총장 외엔 눈에 띄는 이가 거의 없다. 그는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IOC 내 인맥도 두텁다. 한때 김부위원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외교력과 인맥을 쌓았다. 이밖에 IOC 선수분과위원으로 활약 중인 전이경씨,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소희씨 등이 훗날 스포츠 외교통이 될 수 있는 재원으로 꼽힌다. 이들은 세계 스포츠기구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임원들의 대부분이 선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결국 결론은 ‘김운용식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심판 선수 경기단체 등을 중심으로 스포츠 외교를 다변화하고 엘리트 위주의 학교 체육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는 것. 서구에서 체육인은 신체적 능력에 학식까지 갖춘 신사로 통한다. 승리만을 좇는 한국의 학교 체육 풍토에서 ‘스포츠 신사’를 논하는 것은 공연스러운 얘기처럼 들린다. 안민석 교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김운용식 마인드를 버리는 것이다. 로비를 통해 국제대회를 유치했다고,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죽으라고 훈련시켜 금메달 몇 개 땄다고 우쭐대는 촌스러운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구 동구권 식의 후진적 사고를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개혁은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