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일 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의 구속영장을 집행하려는 검찰 관계자들을 막고 있는 민주당원들.
사실 한 전 대표는 체념 상태였다. 1월29일, 그는 심야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민주당 지도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저녁엔 서울구치소에서 자게 될지도 모르겠다. 반성과 교양을 쌓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여러모로 미안하다.”
“천문학적 밥값·비행기값 공개될 것”
측근들과 릴레이 회의를 거쳐 내놓은 입장에는 억울함도, 회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자포자기의 심리상태였다. 한 핵심 측근은 “군사정권 시절 감옥 갈 때는 명분이라도 있지, 이건…”이라며 울분을 토로했지만 당사를 감싼 위기감에 묻혀 메아리를 만들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동교동의 마지막’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 전 대표는 DJ에게 전화를 걸어 ‘먼 길(?)’을 떠나는 사람으로서의 예를 갖췄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기류가 바뀌었다. 반전의 흐름은 한 전 대표의 달라진 점심상에서 감지됐다. 한 전 대표는 이날 당사 3층 대표실에서 측근들과 컵라면과 김치로 점심을 때웠다. 전날부터 상경한 전남 무안·신안지구당 당원들이 성대(?)한 오찬장을 이중삼중으로 지켰다. 구속을 각오했던 한 전 대표는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듯 투쟁의 기치를 내걸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29일 밤, 한 전 대표는 ‘체념의 변’ 중간에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의 영입 제의를 지나가는 말로 불쑥 던졌다. 한 전 대표는 영입 제의를 압박이라고 표현했다.
“며칠 전 모 장관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 장관이 대통령 뜻이라면서 우리당과 같이하자고 제의하더라.”
한 전 대표는 그 자리에서 이를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지내놓고 보니 이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다음날 확대간부회의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여당의 영입시나리오를 폭로했다.
“우리당 김원기 고문이 나에게 측근 의원들을 이끌고 민주당을 탈당하라고 주문했다. 민주당을 두동강 내고 탈당인사들을 중심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한 뒤 우리당과 합당하자고 제안했다.”
사실이라면 군사정권 시절의 정치공작에 버금갈 정도로 ‘파괴력’을 가진 발언이었다. 옆을 지키는 측근들은 그의 발언이 ‘팩트’임을 케이스를 들어가며 확인시켰다. 한 참모는 “식사를 같이 하자는 우리당 A의원의 프로포즈가 잇따랐다”고 증언했고, 다른 참모는 “한 전 대표가 우리당에서 해야 할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무현, 정동영, 이인제 후보(위 왼쪽부터)가 2002년 4월14일 전남 순천 팔마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남지역 경선 투표 진행과정을 지켜보고 있다.민주당에 복당한 김홍일(아래 가운데)의원이 2월1일 여의도 당사를 찾아 농성 중인 조순형 대표(왼쪽)와 한화갑 전 대표 등과 인사하고 있다(가운데).
한 전 대표는 DJ 이후 호남맹주로 평가받는다. 호남은 그를 매개로 민주당에 결속된다. 분당 후 민주당은 호남에서 줄곧 우리당에 비해 2~3배 지지층을 유지했고 그 배경에는 한 전 대표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숨어 있었다.
한 전 대표가 구속되면 호남 패권은 장담하기 힘든 상태다. 민주당이 결사항전의 의지로 저항한 이유는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올인식 승부는 일단 이런 흐름을 막는 데 일정부분 성공한 듯 보인다.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이번 사태로 배신론이 먹혀들고 있다”며 호남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표들이 다시 결집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실제로 한 전 대표의 농성과 저항 이후 여권과의 전선이 형성되면서 “여론이 좋아지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중앙당에 올라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에 앞서 한 전 대표는 1월 말, 한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상인들이 자기자본을 지키면서 장사해야 이득을 남기는데, 민주당은 자본을 버리고 있다.” 호남 해체에 대한 걱정이다. 한 전 대표의 이런 위기의식은 당 지도부 모두가 공유한다.
민주당은 3일 광주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호남 1당이라는 목표를 향한 진군나팔을 불었다.
김홍일 의원도 복당 … 金心 반영?
민주당은 이제 2002년 경선자금 의혹과 관련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 예정이다. 경선 당시 노무현 캠프의 금고지기였던 안희정씨가 대우건설로부터 5000만원의 불법 경선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정’ 경선자금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기자회견을 통해 경선과정에서의 불법자금 부분을 시인한 바 있다. 추미애 상임중앙위원은 “한 전 대표가 불법적으로 받은 돈이 노대통령이 받은 돈의 10분의 1을 넘으면 구속하라”고 수위를 높였다. 강운태 사무총장은 두 사람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 경선자금의 쟁점화를 위한 장(場)을 마련했다.
민주당 한 사무처 인사는 “경선자금 관련 자료는 사실 분당 당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며 “이런 자료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유추하면 대강의 경선자금 규모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끝까지 경선 레이스를 한 노대통령과 정동영 당의장의 경선자금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당 한 관계자는 “팔도를 도는 데 들어간 후보단의 비행기값, 기름비, 동원된 지지자들의 숙박료와 식비 등등을 감안하며 레이스를 마친 인사들의 경선 비용은 10억원에서 20억원 정도의 자금이 소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당 관계자들이 흘린 자료와 정황, 그리고 당시 기억을 통해 불법자금에 대한 뼈대가 재구성되고 있다. 청문회를 기대하라. 천문학적인 밥값과 비행기값이 공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공세는 사실 호남 표심을 자극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상당부분 묻어 있다. 그러나 일단 효과는 있어 보인다. 탈당했던 정범구 의원이 재입당했고, 김홍일 의원도 ‘가출’ 12일 만에 복당해 힘을 보탰다. 특히 김의원은 김심(김대중 전 대통령의 속마음)의 향배를 유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김의원의 한 측근은 “김의원이 당초 무소속을 결심했을 때는 민주당과 우리당 양당이 궁극적으로 통합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DJ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전 대표 구속 상황이 현실화하자 “화갑이 형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고민했다고 한다. 김의원은 “최근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복당 배경을 설명했다. 김의원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에게 “화갑이 형이 노무현 정권에 의해 박해받고 있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지금도 여전히 먹구름에 덮여 있다. 지금도 검찰의 사정칼날은 여전히 당사 주변을 겨냥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민주당 의원들의 아침 인사 고스란히 배어 있다. 1월 말 조순형 대표를 만난 김경재 의원은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며 손을 내밀었다. 조대표는 “이제 아침 점호를 해야 할 판”이라고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