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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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판사가 황혼이혼 ‘땅땅땅’?

생활현장 분쟁해결 경험과 연륜 부족 … 탈획일화·수평구조 때 튀는 판결도 가능

  • 임지봉/ 건국대 헌법학 교수·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jibonglim@ kkucc.konkuk.ac.kr

    입력2004-02-06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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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혼 판사가 황혼이혼 ‘땅땅땅’?

    미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얼 워렌 전 미국연방대법원장.

    미국 사람들은 ‘멋진 법관’이라고 하면 으레 전 워렌(Earl Warren) 대법원장을 떠올린다고 한다. 그는 1953년부터 69년까지 미국 연방대법원의 수장으로 재직하면서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신장을 이룬, 주옥같은 판결을 쏟아낸 인물이다.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던 흑백 인종 간의 분리교육을 위헌선언으로 끝장낸 브라운 판결도 그가 직접 집필한 판결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가히 미국 역사의 물줄기를 ‘소외된 서민의 인권보호’라는 방향으로 튼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런 그에게 미국 국민들은 아낌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판사도 법과대학에서 공부로 두각을 나타낸 우등생은 아니었다. 버클리 로스쿨 재학시절 그의 학교 성적은 그렇게 신통한 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그는 로스쿨 졸업 후 박봉으로 인해 미국 로스쿨 졸업생들이 진출을 꺼리는 ‘검사보’를 택해 법률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후 검사를 거쳐 정계에 뛰어든 그는 대법원장에 임명되기 직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는 등 정치인으로서도 성공을 거둔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관’이라는 말은 곧 ‘젊은 수재’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이른 나이에 합격하고 연수원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수재들이 보통 법복을 입고 법관석에 앉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법관들은 하나같이 경향각지의 명문 고등학교와 명문 대학을 나온 ‘분’들이다.

    역사 바꾼 워렌 美 前대법원장 국민 존경 한 몸에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급 법관들의 사법시험 합격시의 평균연령이 22.8세라는 통계가 보여주듯, 아주 젊은 나이에 사법고시의 높은 문턱을 훌륭히 넘은 분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질의 우수성은 우리 법관의 1인당 처리사건 수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2002년 현재 전국의 1438명의 법관들이 1년간 총 563만4683건의 사건을 처리했으니 법관 1인당 연간 3918건의 사건을 처리한 셈이다. 외국 변호사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혀를 내두른다. 과연 초인적인 능력이요, 일벌레가 아니고는 감당할 수 없는 업무량이다. 늦게까지 일하고도 집에 일할 보따리를 한아름씩 갖고 가는 법관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우수한 법관들 중에 워렌 대법원장처럼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은 분은 없어 보인다. 젊고 우수한 인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법부에 모여들어 우리의 사법부를 이끌어왔지만, 그 엘리트 집단 사법부가 우리 사회의 발전이나 역사 발전에 큰 동력을 제공했는가라는 물음에는 그 대답을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왜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우리의 법관임용방식과 법관인사제도에서 찾고 싶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의 성적위주 법관임용방식과 폐쇄적이고 경직된 법관인사제도가 소신에 찬 판결로 사회변화를 이끄는 적극적인 법관보다는 대법원 판례를 절대시하고 그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않으려는 무난하고 일 많이 하는 법관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법시험에서의 고득점과 좋은 연수원 성적만 갖고 있으면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법관이 될 수 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판사가 황혼이혼소송에서 백발의 노부부를 상대로 재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법원의 현실이다. 젊은 나이에 법서에만 묻혀 별다른 사회경험을 해보지 못한 수재가 사회의 복잡다기한 생활현장에서 벌어진 다양한 분쟁들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혼 판사가 황혼이혼 ‘땅땅땅’?

    우리나라 법관에게는 ‘튀는’ 판결을 기대할 수 없을까.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재판정 내부.

    재판이란 ‘설득의 과정’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처음에는 양 당사자가 여러 가지 증거와 증인들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고 나중에는 판사가 논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판결이유를 가진 판결로 이 당사자들을, 또 사회를 설득하는 과정이 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송 당사자보다 훨씬 연소한 재판관의 판결이 소송 당사자들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생생한 노동현장의 모습을 보고 듣고 경험하지 못한 판사들이 노동자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으며,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분쟁의 해결에 얼마나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법관 임용의 방식을 다양화해야 한다. 기존대로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이들 중에서도 예비판사를 뽑고 판사를 뽑아야 하지만 생활현장을 발로 뛰어보고 온몸으로 경험한 변호사들, 공적 영역뿐만이 아니라 사적 영역도 대리해본 변호사들 중에서도 법관을 적극적으로 뽑아야 한다. 그래야 재판의 설득력도 높아질 수 있고, 경험과 연륜에서 발원된 소신으로 획기적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과 비교해봐도 우리처럼 법관 임용의 방식을 단일화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법관집단을 만든 후 이 법관들의 관계를 종래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꿔놓아야 한다. 우리 사법부는 지방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단독판사, 고등법원 배석판사, 지방법원 부장판사, 고등법원 부장판사, 각급 법원장, 대법관, 대법원장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상하구조를 가지고 있다.

    재판은 ‘설득의 과정’ … 임용 방식 다양화 도입을

    이 수직적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쉼 없는 승진을 위해서는 소위 ‘튀는 판결’을 해서는 곤란하다.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는 판결은 항소 상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뒤집어지고 이로 인한 높은 파기율은 승진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소신 있고 독립된 과감한 판결은 나오기 힘들다.

    기수와 서열 중심의 법관인사제도에 대한 비판이 일자, 최근 우리 법원은 근무평정제도의 확대를 골자로 하는 법관인사제도 개선안을 들고 나왔고 법원장이나 고등부장의 임명에 기수와 서열을 뛰어넘는 탄력적인 인사를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근무평정제도의 확대는 판사들을 더더욱 옥죄는 사슬이 될 수 있어 문제다. 법관들을 더더욱 법원 상층부에 신경을 쓰는 법관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많은 평가 항목들이 근무평정에 들어가게 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에 대해 기수와 서열도 안 되고 근무평정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법관들 사이의 관계를 수평화하면 된다. 촘촘한 상하의 단계구조를 허물어뜨리고 판사를 지방법원 판사, 고등법원 판사, 대법관으로 단순화하면 되는 것이다. 기존의 상하관계의 틀을 계속 유지하는 한 개별 법관들의 기를 살리고 소신 있는 판결들을 끌어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법관임용방식의 다양화와 이로 인한 사법부 구성의 탈획일화, 수평적 사법부 구조로의 변화가 있어야만 개별 법관의 독립이 철저하게 보장될 수 있고, 소신 있는 판결로 한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할 ‘멋진 법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워렌 대법원장보다 자질 면에서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은 우리 법관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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