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집무실에서 연방회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부시 대통령(오른쪽)과 딕 체니 부통령.
국정연설에서 부시가 느닷없이 애국법(Patriot Act) 개정을 꺼내든 이유도 대(對)테러전이 재선 전략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시효가 만료되는 내년 말에 꺼내도 될 일을 1년이나 앞서 거론하자 일부 공화당 의원들조차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공화당 내에서 의회 의원들과 백악관 참모들 사이에 충돌이 잦아졌다.
3년 가까이 숨어 지내다시피 했던 체니 부통령도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부쩍 늘었다. 마지못해 ‘언론과의 대화(Meet the Press)’ 프로그램에만 가끔씩 얼굴을 내밀던 그가 이제는 아예 여기저기 TV 토크쇼를 찾아다닌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발걸음도 잦다.
“계속 입다물고 앉아 있다가는 민주당의 펀칭 백만 된다. 부시 행정부의 비밀주의, 기업 관련설, 미확인 정보 의존 등 민주당의 공격거리가 체니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적의 공격에 피뢰침이 될 수는 없다.” 공화당 내 한 고위 전략가의 말이다.
체니는 이미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는 선거자금 모금 모임에 뛰어다니고 있다.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결정되고 나면 체니는 부시 대신 TV에 자주 얼굴을 들이밀 것이 뻔하다. 체니는 다보스 포럼 연설에서도 전혀 그답지 않은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라크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는 열변이었다. 이 역시 백악관의 기획 작품이다. 부시 혼자서만 총 든 카우보이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잠잠했던 체니 카우보이 구하기
아이오와, 뉴햄프셔, ‘슈퍼 화요일’로 예비선거가 이어지면서 미 언론은 온통 민주당 후보들 얘기로 뒤덮였다. 워싱턴 정치판의 지략가치고 입다물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당원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상황실(war room)을 설치해 민심을 점검해나가고, 당 전략가들을 총동원해 (그래 봐야 전통적으로 공화당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TV와 라디오 토크쇼에 내보낸다.
공화당 전략가들도 민주당 후보와의 가상 대결구도를 만들어놓고 전국 판세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공화당은 2003년 가을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후보 가운데 존 케리 상원의원과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에 초점을 맞추어 선거 전략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언론에 하워드 딘 돌풍이 일어나자 딘 바람 막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정작 공화당 선거 지략가들의 머릿속에 딘은 상대가 아니었다.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가 1월27일 뉴햄프셔에서 벌어진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딘은 예비선거에서 연방으로부터 선거자금 지원을 받지 않았다. 아무 제한 없이 선거자금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존 케리도 딘과 같은 전략을 택했고 아이오와에서는 전국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총력을 기울였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딘보다 케리가 더 어렵다. 외교 분야의 경력이 풍부하고 베트남전 출신으로 반전운동에도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함부로 나대지도 않고 돌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민주당원이고, 자금력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래도 공화당으로서는 매사추세츠 출신의 이 민주당 후보를 상대한다는 시나리오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딘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고, 케리는 한번 해볼 만하다는 것이 공화당의 판단이다.
공화당의 이런 판단에는 부시의 공격거리가 될 케리의 약점이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우선 케리는 뚜렷한 색깔이 없다. 주도권을 쥐기보다는 공격에 맞서 대응하는 쪽이며, 신선한 맛이 없어 낡아 보인다. 한마디로 표현할 만한 특징도 없다. 한 정치 분석가는 “케리는 상원 재선운동을 하는 것 같다. 자기 이력이나 밝히고 정치경력만 선전한다.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꼬집었다.
웨슬리 클라크에 대해서는 공화당이 그리 위협적인 상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클라크는 한마디로 “헷갈린다”는 게 공화당의 평이다. 나토사령관을 지낸 군 경력 빼고는 부시를 궁지에 몰아넣을 이렇다 할 무기가 없다. 게다가 클라크는 닉슨과 레이건을 지지하지 않았느냐는 민주당 후보들의 공격에 자신이 왜 민주당원인지를 설명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늦게 뛰어든 처지에 실수를 연발하고 있다.
공화당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은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이다. ‘스캔들 없는 클린턴, 남부(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케네디’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이다. 공화당이 가장 버거워하는 상대다. 알려진 것이 많지 않고 정치 성적표가 낱낱이 밝혀지지도 않았다. 에드워즈에게는 큰 무기가 되면서 부시에게는 치명타를 안길 수도 있다. 유권자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변신할 가능성이 있고 변신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는 케리를 싫어한다. 민주당은 딘을 싫어하고, 군인들은 클라크를 싫어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공화당에서 나온 말이다. 버거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화당도 그가 정치판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다. ‘16세 소년’ 소리까지 들을 정도다. 거친 맛의 부시와 맞설 경우 전혀 다른 맛인 에드워즈가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공화당의 선거 두뇌들도 함부로 가늠하기 어렵다.
민주당의 최대 고민은 부시를 상대할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다. 예비선거 전 하워드 딘이 선두였을 때도 최대 관심사는 당선 가능성이었다. 존 케리가 입만 열면 “부시를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할 사람이 누구냐”고 민주당원들에게 부르짖는 것도 민주당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을 후보로 뽑는다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게 미 정치판, 미 선거판의 재미를 더한다.
정치 분석 칼럼니스트인 스튜어트 로센버그가 미 의회 소식지 ‘롤 콜(Roll Call)’ 1월5일자에 대선 후보들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정권을 빼앗긴 지 4년 만에 후보를 내는 당에서는(지금의 민주당처럼·역주) 아주 걸출한 지도자, 또는 그 당의 색깔과 맞지 않은 돌출적인 인물이나 개혁을 부르짖는 후보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정치풍토에서는 이럴 경우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1996년의 예를 봐도 그렇다. 공화당은 재선을 노리는 클린턴에 맞서 보브 돌을 후보로 뽑았다. 당시 보브 돌은 공화당을 짊어질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다. 워싱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재치도 있으며 의회 경력이 30년이 넘는 73세의 정치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상대인 클린턴을 누를 인물은 아니었다. 공화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당선 가능성은 8년 동안 정권을 빼앗겨본 다음에야 중요하게 고려된다. 4년 만에 후보를 세우는 당은 상대당 후보와 싸우기보다 자기 당 내부 투쟁에 더 골몰하게 된다.’
지금의 민주당이 그렇다. 로센버그의 말처럼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실망이 크다. 지난해 11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44%에 지나지 않았다. CBS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분의 2가 당선 가능성보다 현안에 대한 후보의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미 헌법을 만든 두뇌들은 유권자들을 표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유권자는 관람자(reviewer)가 아니라 행동가(activist)다. 그러니 예비선거는 잔치판이 될 수밖에 없고, 후보는 유권자를 섬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전쟁을 하면서도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