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6

2004.08.05

7박8일 길 위에서 찾은 ‘호연지기’

현대고 181명 212.4km 국토순례 도보행진 … “극기와 상대방 배려 함께 사는 방법 배워”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7-30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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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박8일 길 위에서 찾은 ‘호연지기’

    7월 20일 경기 안산시 대부도의 쌍계사에서 경기도 청소년수련원을 향해 행진하고 있는 현대고 학생들.

    7월20일 오후 2시 경기 안산시 대부도의 쌍계사. 국토순례에 나선 지 4일째인 181명(남학생 87명, 여학생 94명)의 현대고등학교(이하 현대고•교장 김두성) 학생들이 30분간의 휴식을 마치고 도보 행진에 나섰다. 바닷가의 끈적한 습기 때문에 더욱 무덥게 느껴지는 날씨. 까맣게 그을은 이들의 얼굴에선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흐른다. “힘들어요, 목말라요”를 연발하던 학생들이지만, 다른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다리에 붕대를 감은 친구가 쉽게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내밀어주고, 시원한 물을 함께 나눠 마신다.

    4일째 이어진 도보 강행군에 지칠 법도 한데, 이들의 얼굴에선 짜증스러운 빛 하나 찾을 수 없다. 끈적끈적한 몸을 부대끼면서 서로의 우정을 발견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이들은 후텁지근한 더위까지 벗으로 만들었다. 이날 연두색 유니폼을 입은 현대고 국토순례단의 행렬이 대부도를 초록빛으로 수놓았다. 현대고의 ‘우리땅읽기’ 국토순례가 7월17일부터 7박8일간 이뤄졌다. 최근 각급 학교가 다양한 특기 적성교육을 선보이고 있는 가운데, 현대고의 국토순례 프로그램은 단연 돋보인다.

    1999년부터 6년째 여름방학 국토순례를 진행해온 유일한 학교이기 때문. 현대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번 국토순례에서 경기 강화군 외포리에서 충남 당진군 신평면 신평중고까지 212.4km에 이르는 거리를 하루 9시간씩 걷고 또 걸었다.

    하루 9시간씩 걷고 또 걷고

    현대고가 ‘국토순례’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남북 화해의 기초를 다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현대고 설립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학교는 금강산 육로 관광이 가능해지면, 간성을 출발점으로 금강산을 거쳐 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통천까지 국토순례 코스를 추가하겠다는 장대한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국토순례에 참가한 학생들은 모두 ‘열혈 지원자’들. 해마다 참가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이 늘고 있어 프로그램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현대고에 입학한 이상 ‘국토순례’는 꼭 경험해야 할 과정으로 손꼽힐 정도다. 현대고 국토순례단을 총 지휘한 김태웅 교사는 “국토순례는 학생들에게 국토와 민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들의 호연지기를 길러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라며 “못 버티고 금방이라도 포기할 것 같은 학생들이 강한 모습으로 변모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7박8일 길 위에서 찾은 ‘호연지기’
    평소 입시에 매달려 규칙적인 운동조차 못하는 학생들에게 하루 9시간의 도보는 ‘고난의 행군’과 다름없을 터. 게다가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강남8학군(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속한 현대고 학생들은 방학 때도 ‘학업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돈까지 내고 웬 생고생이냐”는 일부 학생들의 삐딱한 시선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험난한 국토순례에 도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말고사를 보기 2주 전부터 국토순례 갈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어요. 답답한 서울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끽하는 해방감을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지난해 힘들게 걸을 땐 ‘다시 국토순례에 참가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소중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던걸요.”(2학년 대표 안홍원군) “선생님의 권유로 참석했어요. 제 자신도 시험해볼 수 있고, 무엇보다 다이어트가 되니 좋은데요.”(1학년 김보미양) 이른바 3타라고 불리는 발가락 물집(발타), 사타구니 물집(사타), 엉덩이 물집(똥타)도 이들의 행군을 방해하지 못했다. 4일째 먼 길을 걸어온 많은 학생들은 일회용 밴드가 잔뜩 붙여진 발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발목에 붕대를 감은 학생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염제를 바르며 꿋꿋이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얼굴엔 고통스러운 표정보다 유쾌한 웃음이 넘쳐흐른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이들의 활기에 무릎을 꿇을 태세다.

    7박8일 길 위에서 찾은 ‘호연지기’
    김윤미 양호교사는 물집, 습진, 골절 등으로 고생하는 학생들의 의지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학년 선영이는 순례 도중 다리 인대가 늘어났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눈물을 터뜨리던걸요. 한의원에서 ‘하루만 순례를 쉬고, 밤마다 찜질을 하면 순례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리자, 선영이가 뛸 듯이 기뻐했어요. 불편한 다리로 끝까지 행진을 포기하지 않더군요. 이것이 바로 현대고 학생들의 힘이 아닐까요?” ‘극기(克己)’와 더불어 학생들이 얻는 또 다른 소중한 가치는 바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국토순례에 참가한 2학년생들의 후배 사랑은 각별하다(입시 때문에 3학년은 국토순례에 참가하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 후배를 돕는 것은 물론, 밤에는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후배들의 잠자리를 지킨다.

    후배들도 마냥 어렵게만 여겼던 선배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최다혜 교사(23)는 “후배들을 챙기는 2학년생들의 책임감 있는 태도가 가슴에 남는다. 아이들의 의젓한 태도가 교사보다 나은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현대고의 국토순례에 참가한 이들은 비단 재학생과 교사들뿐만이 아니다. 이미 학교를 떠난 졸업생들 역시 ‘국토순례의 추억’을 잊지 못해 이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10명의 졸업생은 국토순례 대장정에서 후배 재학생들과 교사들의 중간 가교 몫을 톡톡히 해냈다. 졸업생 중 최고 고참으로 국토순례 5회 참석의 기록을 세운 10회 졸업생 김준현씨(26)는 남다른 후배 사랑을 보여주었다. “99년 졸업생 자격으로 처음 국토순례에 참가하며 느낀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첫 번째 순례에서 제가 쓰러졌을 때, 재학생 후배들이 달려와 저를 간호해주고, 여벌의 옷을 선뜻 내놓았거든요. 선배를 마냥 어려워하는 후배들이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이 고마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마지막으로 꼭 한 번 참석해야겠다는 생각에 달려왔죠.”

    벌써 6년째 … 졸업생도 참가

    6년에 걸친 국토순례의 역사와 전통은 바로 끈끈한 ‘선후배 간의 우애’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현대고 학생들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굳어져버린 ‘압구정동 고등학생’ 이미지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무더운 더위 속에서 먹는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의 소중함을 알고,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 밥을 먹고 잠도 청할 수 있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라는 것. “이기적이고 공부만 하는 강남8학군 학생의 이미지요? 그거 다 편견이에요.” 학생들의 항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쩌면 4일간의 국토순례 과정이 이들을 더욱 성숙하게 바꾸어놓은 듯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단에게 필요한 것은 ‘승부의식’이 아니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임을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2학년 이응돈군은 “학교 교실에서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던 친구들과 깊은 우애를 나누게 됐다”며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한 벽을 허물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기쁘다”고 털어놨다.

    7박8일 길 위에서 찾은 ‘호연지기’

    현대고 학생들은 쌍계사에서 잠시 쉬며 국토순례의 의지를 다졌다.

    오후 5시쯤 경기도 청소년수련원에 도착한 현대고 학생들은 모처럼만의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이날 밤 학생들은 서울의 부모님이 보낸 정성 어린 편지를 받아 들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렸다. 이 눈물은 자신을 뒤에서 항상 지원해준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인 한편, 부모님의 그늘과 보호에서 벗어나 홀로 고통의 시간을 이겨낸 자신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해마다 현대고 국토순례단의 순례에 참가해온 정천모 교사는 “대개 어려움과 고통 없이 자라온 학생들이 7박8일간의 국토순례에 참가하기 위해 ‘대단한 각오’를 한다”면서 “우수한 친구들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국토순례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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