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급 회담 합의에 따라 6월14일 북한 함정과 첫 무선 교신을 시도한 우리 함정.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 당일의 남북 함정 간 교신에 관한 논란이다. 이 사건은 발생 다음날 국정원의 정보 보고와 북측의 전화 통지문이 공개되면서, ‘북측 함정이 남북 장성급 회담 합의에 따라 세 번이나 교신을 시도하는 등 도합 여덟 번의 교신이 있었는데도 군이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사건 당일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합의한 ‘교신’은 있었는가. 7월23일 합동조사단의 발표 때 박정조 단장은 여덟 번 교신이 있었다고 밝혔으나 교신과 송신이라는 용어를 교묘히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교신은 전화통화처럼 양쪽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고, 송신은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처럼 일방적으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지적하며 기자가 “사건 당일 남북 함정은 교신을 한 것인가, 일방적인 송신을 한 것인가” 따져묻자, 박단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한 요지의 설명을 들려주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방적인 송신만 여덟 번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측 함정이 NLL을 내려오고 있을 때 우리 함정은 이 배와 교신하기 위해 네 번 ‘백두산’을 호출했으나 북측 함정은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 함정이 경고사격 준비에 들어갔을 때 북한 함정은 ‘한라산’을 부르며 ‘(지금) 내려가는 것은 우리 어선이 아니고 중국 어선이다’라며 그들 처지에서는 첫 번째 송신이고 전체로 보면 다섯 번째인 송신을 보내왔다.
교신 아닌 일방적 송신 8차례 … 네 번 호출에 무응답
이에 대해 우리 함정은 25초 후 ‘북상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전체로 보면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송신을 보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송신은 간격이 짧아 유일하게 양측이 주고받은 교신(대화)으로 볼 수 있으나, 이후 북한 함정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 남하했다. 때문에 2분 후 우리 함정은 합참 예규대로 경고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북한 함정은 ‘남하하는 것은 중국 선박이다’는 송신을 보내고(일곱 번째), 이어 2분 뒤 ‘귀측은 변침하여 남하하라’는 송신을 보낸(여덟 번째) 후 NLL 북쪽으로 돌아갔다.”
결국 남북 함정은 전화통화를 하듯이 여덟 번이나 대화를 한 것이 아니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듯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보내는 송신만 여덟 번 했던 것이다. 국정원의 보고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교신과 송신을 혼동해 전혀 현실성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대통령마저도 현실을 잘못 이해하게 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두 번째로 살펴볼 문제는 북측이 송신한 내용의 진실 여부다. 다섯 번째 송신에서 북한 함정은 ‘내려가는 것은 중국 어선이다’라고 송신했는데 과연 이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일까.
NLL에는 주로 신의주 서쪽에 있는 중국 동항(東港)에서 출항한 중국 어선이 수백에서 수천 척씩 몰려들어 조업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남측 함정이 출동하면 북측 수역으로 넘어가고 북한 함정이 달려오면 남측 수역으로 넘어오는 줄타기 항해를 하면서 NLL 부근의 고기를 싹쓸이한다.
7월14일 남북 함정이 출동한 현장에는 네 척의 중국 어선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박단장은 “북한 함정이 NLL선을 넘었을 때 이미 중국 어선은 서쪽으로 2km 정도 이동(도주)했다. 중국 어선이 현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내려가는 것은 중국 어선이다’라고 한 북측 송신 내용은 사실과 달랐다. 우리는 이를 입증한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북측은 내용뿐만 아니라 시간도 틀린 주장을 했다. 7월15일 북측이 보내온 통지문에는 4시 45분에 북측이 송신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전체로 보면 다섯 번째 송신에 해당). 남측 함정이 경고 사격을 한 것은 4시 54분이므로, 북측 주장대로라면 남측 함정은 북측 송신을 받고 무려 9분이 지난 뒤 사격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해 박단장은 “북측 송신은 4시 45분이 아니라 6분 뒤인 4시 51분에 이뤄졌다. 우리는 그에 대해서도 명확한 증거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날 서해상에서 이뤄진 여덟 번의 송신은 국제상선공통망 주파수로 이뤄진 것이라 인근에 있던 배는 전부 들을 수 있는 것이라 남측이 송신 시각을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단장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장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측 송신에 대해 25초 후인 4시 52분 남측 함정은 “북상하지 않으면 발포한다”는 내용의 여섯 번째 송신을 보내고, 이어 2분 후 합참 예규대로 경고사격을 가했다. 합동조사단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건 당일 작전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공식 발표한 것이다.
세 번째로 살펴볼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적으로 논쟁이 된 ‘왜 현장에서 이뤄진 송신 부분을 제대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는가’다. 앞서 밝혔듯 현장에서 주고받은 송신은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해군작전사령부와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하는 감청부대는 물론이고 감청기관을 갖고 있는 국정원도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이뤄진 송신을 없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인데, 왜 해군 등은 상부기관인 합참 등에 이를 보고하지 않았을까.
한 달 뒤 남·북 함정은 교신 약속을 어겨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단장은 “이는 판단의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8차례 송신 중 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송신뿐인데 그나마도 북측은 허위 정보를 보내왔으므로 해군작전사령부는 여덟 번의 송신 전부를 장성급 회담에서 합의한 합법적인 교신이 아닌 ‘기만’으로 판단해 최고 군령부대인 합참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른 부대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감청부대는 이날 있었던 송신을 합참 정보본부에 알렸으나, 합참 정보본부는 해군과 접촉하지 않고 단독으로 역시 ‘기만’으로 판단해 정보본부장과 합참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합참의 작전본부 또한 정보본부를 통해 8차례 송신이 있었던 것을 들었으나 역시 같은 이유로 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군의 3개 기관은 똑같은 판단을 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국정원이 이를 교신으로 판단해 노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판단에는 문제가 없었을까. 박단장은 “군의 판단이 옳고, 국정원의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며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7월23일 진상조사를 발표하는 박정조 합동조사단장.
태산명동에 서일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을 군이 조직적으로 항명한 것이냐’는 의혹을 일으켰던 7·14 NLL 사건은 이렇게 끝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직후 조영길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고의로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답함으로써 야당 측의 공격을 자초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더 이상 새로이 조사할 것은 없다”며 이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와대 측이 군의 반발을 우려해 확전을 자제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조영길 국방부 장관의 국회 답변을 둘러싸고 국방부 측에서는 “단순 실수”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일각에선 “허위 보고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면서도 노대통령의 포용성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라고 해석한다. 다른 한편에선 자신을 흔드는 것으로 보이는 군 지휘부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잡아놓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군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NLL 사수와 남북 화해 협력이라는 상반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해군의 고민과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군에선 2002년 서해교전 당시 아군 고속정을 기습 공격해 24명의 사상자를 낸 ‘등산곶684호’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고, 이런 긴장이 이번 사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보면 이 사건은 평화번영 정책에 무게를 두고자 하는 이상주의자와 NLL을 사수해야 하는 현실파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불거졌다고 할 수 있다.
‘NLL’ 또는 ‘분계선’으로 분명히 하지 않으면 사고 반복 불가피
6월12일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합의에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숨어 있다. 당시 남북이 합의한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 부속 합의서에는, 남북 해군은 국제상선공통망 주파수를 이용해 ‘백두산(북측 함정)’과 ‘한라산(남측 함정)’을 호출해 우발적인 충돌을 방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합의나 약속은 ‘언제, 어디서…’의 6하 원칙에 따라 기술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합의에는 ‘어디’에 해당하는 부분이 명확히 표기돼 있지 않았다. 합의서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디’에 해당하는 표현은 ‘서해 해상’ 하나뿐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서해 해상은 NLL(북방한계선)이지만 북한이 전혀 다른 바다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 합의는 절대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
정전 후 NLL이 자연스럽게 서해상의 해상 경계선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이의 무력화를 시도한 것은 정전 20년째인 1973년 10월이었다. 당시 북한은 전투기를 백령도 상공으로 투입하고 함정을 NLL 남쪽으로 내려보내며 NLL을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작전권은 미군이 갖고 있었으므로 한국군은 포를 쏘는 식의 무력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박정희 정부는 우리 함정으로 하여금 북한 함정을 들이박는 ‘해상박치기’ 전술을 구사케 했다. 99년 연평해전의 해상박치기 공격의 원조에 해당하는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남측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북한 함정을 NLL 이북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남측의 사격을 유도해 국제적으로 NLL이 분쟁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리려 했던 북한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남북은 1992년 불가침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 11조에는 ‘남북의 불가침 경계선은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는 남측에 매우 유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남측은 이 조항을 근거로 “NLL 이남은 우리가 관할해왔으므로 NLL은 실질적인 해상 경계선이다”라는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2002년 서해교전으로 희생된 장병 영결식.
이 해상 군사분계선은 북측의 옹진반도와 남측의 태안반도 사이의 중간점을 잡아 육지의 군사분계선이 끝나는 데서부터 직선으로 이은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북한은 이 분계선에서부터 폭 2해리(약 3.7km)의 해로를 열어줄 테니 남측의 일반 배와 유엔군 군함은 이 수로를 통해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출입하라는 ‘서해 5도 통항질서’도 함께 내놓았다.
북한 측 주장을 수용하면 인천항으로 출입하는 선박의 안전은 위협받게 된다. 아울러 남측 군함은 서해 5도로 들어가지 못해, 서해 5도의 안보도 매우 위태로워진다. 때문에 남측은 북한의 주장에 대해 일언반구 대꾸하지 않고 NLL을 지키는 데 전력했다.
서해 경계선은 우리 측의 NLL이냐 북측이 주장하는 해상 군사분계선이냐. 이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지 못하면 어떤 합의를 도출하든, 남북은 서해상에서의 충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이 던져준 교훈은 한 가지다.
‘정부는 서해 해상이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남북 합의를 도출해 과잉 홍보할 것이 아니라, NLL이면 NLL, 해상 군사분계선이면 분계선 식으로 ‘어디’를 분명히 하는 합의를 도출해 이를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장병들이 희생되거나 위축되는 사고만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NLL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