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옹(85). 일제의 식민통치와 뒤이은 분단과 독재, 좌우대립 등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 현대사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그 자신이 하나의 현대사가 되어버린 김옹이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한 것은 지난 9월25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사흘장을 모두 마치고 난 뒤인 9월28일경. 김옹이 자신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고 유언한 데 따라 유족들조차도 측근 몇 명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김옹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추석 연휴가 시작될 무렵,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김옹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래서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등 국내에도 수많은 독자를 가진 소설가이자 옌볜 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김옹을 기억할 만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주간동아’가 입수한 김옹의 사망 직전 마지막 생애와 장례 현장을 담은 사진은 평생을 항일투쟁과 김일성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에 바친 혁명가의 마지막 삶이 얼마나 고결하게 마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옹은 눈감기 20여일 전부터 곡기를 일절 끊고 자신의 죽음을 하나하나 준비해 왔다. 그의 마지막 생애를 김옹의 유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김옹의 아들 해양씨(52)의 증언과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의 ‘연변일보’ 기고문,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의 수필 ‘김학철 선생님의 쌍지팡이’, 그리고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김학철옹 인터뷰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마지막 서울 방문
김옹은 그동안 8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6월 석 달간 한국에 머무른 것이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이었다. 그러나 김옹 스스로 장기간 체류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김옹은 지난 6월 자신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한 윤세주 선생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윤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치른 기념학술행사에 초청 형식으로 참석했다. 윤세주 선생은 김옹이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항일투쟁을 벌일 당시 같은 분대의 상관이었다. 김옹은 윤선생의 부인을 ‘형수님’이라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김옹은 일정 도중 겨드랑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종양 발병 진단을 받았다. 곧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겨드랑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식도가 파열되는 사고로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병상에 누운 85세의 노혁명가는 건강 걱정은커녕 “독립운동가 중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심경을 내비쳤다고 한다.
석 달간의 입원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김옹은 퇴원을 고집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옌볜으로 돌아간 것은 8월31일. 이미 기력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김옹의 얼굴에서 모종의 결심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털어놓은 사실이지만, 한시라도 일을 안 하면 견디지 못하는 김옹의 성격에 비춰 석 달간의 입원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한다.
옌볜으로 돌아온 지 1주일도 안 되어 그는 미음조차 받아넘기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쇠약한 몸과 희미해지는 정신을 채찍질하며 유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 그가 남긴 짤막한 유서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이와 함께 김옹은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한 ‘실무 지침’까지 내렸다.
‘부고를 내지 말라. 유체 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말라. 일절 부조금을 받지 말라. 골회(유골)는 두만강 하류에 뿌리고 남은 것은 우체국에서 우편용 종이 박스를 구해 여기에 담아 두만강물에 띄워 고향 원산으로 가게 하라.’
뿐만 아니라 김옹은 자신의 유골함에 써넣을 문구까지 정해주었다.
‘元山 앞바다行,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85년을 사는 동안 김옹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굴곡진 역사와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었건만, 그는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한마디로 일축했다. ‘홍성걸’은 김학철옹의 본명. 김옹은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원이 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유언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마지막 길에서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유골함을 알아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서였을까. 그는 평생을 잊고 산 자신의 본명을 이제야 꺼낸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 조선의용대 추도가와 황푸군관학교 교가를 틀어달라고. 조선의용군 추도가는 그 자신이 가사를 쓰고 조선의용대 동료였던 류신이 작곡한 노래로 김옹의 대표적 애창곡이었다.
곡기를 끊은 지 열흘째. 외부와 접촉을 꺼린 김학철옹이 무엇인지 결심한 듯 카메라 앞에 앉았다. 조선의용군의 살아 있는 역사요, 옌볜 조선족의 표상인 김옹을 찾아 한마디라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언론인과 학자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집까지 찾아온 기자들마저 며칠씩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게 하던 김옹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서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닌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카메라 앞에서 마침내 무장 해제했다.
85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유언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극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겪고 있었다. 한마디 던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어렵게 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 : 오늘로 단식 열흘째시라면서요?
김 : 병원이니 주사니 하는 것 다 시시해. (휴-) 자기 한명(限命)을 아는 게 영웅이야, 영웅이라고. 깨끗이 죽는 게 낫지, 지저분하게 사는 것보다야. 자기 한명을 알아야지, 이걸 모르고 얼마나 더 살겠다고…, 난 그런 것 싫어. 노인네가 병들어 누워 텔레비전 보면서 ‘이 약 사와라, 저 약 사와라’ 하는 것, 그게 뭐 철없는 짓이야.
조 :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요.
김 : 그거 다 속인들이야.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하게 승복하고 가는 거야. (휴-). 게다가 나는 85세야.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우리 집사람하고 55년을 살았어.
조 : 선생님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김 : 내 생활신조에서 나오는 거지. 병원에 가 7∼8년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해 봤자 결국 죽는 거야. 난 내 장례식에 나랑 가장 친한 사람들로 딱 12명만 모았어. 며느리도 그날 학교 가는 날이면 출근하라고 했어, 학교가!(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며느리 염리나씨는 옌지 하남소학교 음악교사임).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사필귀정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나라가 망했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 싸워야지. 힘이 약하면 힘 닿는 데까지 싸우는 거야. 그러다가 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지(휴-). 그랬다가 남조선에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니까 평양으로 쫓겨왔지. 거기서 4년 있으면서 김일성이의 온갖 더러운 독재 행태를 보았지. 나는 그동안 김일성을 존중해 왔는데…. 그래서 내가 ‘금슬을 누가 파괴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노동신문에 썼지. 결국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거야. 중국으로 망명했어…. 그런데 모택동이의 대약진 때 3000명이 굶어 죽었어. 아무리 ‘모택동 만세’를 외쳐도 이건 말이 안 돼. 그러고서 또 1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왔지. 그 뒤로 계속 나는 반독재 투쟁을 해온 거야. 내 일생은 반독재로 끝나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싸웠어. 죽을 때까지 싸운 거야. 서울 가서 석 달 입원하고…, 이제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나는 굶으면 열이틀이면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며칠 더 가는 모양이야. 할 수 없지. 조용히 있다 죽는 거야. 원산 앞바다 고향 앞바다로 돌아갈 거야. …그런데 힘이 없어.
조 : 지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말씀만 해주시죠.
김 : 하려면 이야기가 긴데, 숨이 차 못하겠어. 어서 끝내줘.
조 : 건강하십시오.
김 : 고마워, 다시 만나자.
이것이 김옹과 세상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다시 만나자던 김학철옹의 말이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는 살아 있는 자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짤막한 인터뷰가 끝난 뒤 정확히 열하루 만에 김옹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집필이나 연구 등 한시라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김옹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못다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심정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에서 역사학자 염인호 교수(서울시립대)가 보내온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보고 전우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것은 숨을 거두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번쩍 들어 아들 해양씨가 책상에 옮겨놓자 말라 비틀어진 팔목을 들어 확대경을 들고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63년이나 지난 사진이다. 그러나 육신이 촛불처럼 스러져가는 상황에서도 김옹의 기억력은 초인적인 것이었다. 90여 명의 조선의용대원 중 얼굴이 가려진 단 2명만 제외하고는 전 대원의 이름은 물론 별명까지 확인해냈던 것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데다 기력이 소진되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면서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는 아픈 눈을 비비면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일을 내가 안 하면 영원히 력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 것이야.”
가까스로 작업을 끝낸 뒤 침대로 옮겨지면서 그가 가느다랗게 내뱉은 말이었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을 준비해 온 김학철옹은 이제 육신마저 죽음과 친구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빡빡 깎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제 전우들이 모두 가 있는 조선의용대로 복귀한다”는 말과 함께. 지금부터 63년 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삭발했다. 면도까지 마치자 파랗게 깎인 그의 머리 위에 이제까지 자식들은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던 깊숙한 칼자국이 드러났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맞아 찢어진 자국이었다. 김옹의 머리에 깊이 난 상처는 그 후 성성한 머리카락에 묻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훈장이 되었다. 그러나 비로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청년 김학철은 그날의 요동치던 역사로 돌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를 불러 관장을 해달라고 했다. 곡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관장을 한들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심정으로 김옹의 육신을 정갈하게 비워냈다. 그러고 나서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를 깨끗이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김옹은 한쪽 다리가 없다. 1941년 일본군과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나가사키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감옥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상당한 다리를 일절 치료해 주지 않았다. 결국 상처난 다리를 3년6개월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3년 반 내내 다리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상처에서는 구더기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김옹은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내던 역사의 한모퉁이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
이 웃음이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낙관이었을까. 이때부터 아들 해양씨의 눈물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눈빛이 마주칠 때면 김옹은 눈을 감아버렸다.
단식 21일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것만 벌써 9일째이다. 김옹은 이미 말을 잊었다. 언어를 구성할 최소한의 기력마저 잃은 것이다. 오직 손으로만 의사를 표시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부인 김혜원씨와 아들 해양씨에게는 침대맡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9월25일 새벽 2시. 김옹은 침대맡의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30년을 입어 구멍이 숭숭 뚫린 푸른색 중산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덕에 윗옷 겨드랑이는 아예 해지고 없는 낡은 옷이었다. 평생을 입어온 이 푸른 옷은 이제 그의 수의가 될 모양이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옌볜병원 간부병동 103호실. 이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 곳이었다.
김옹은 고통을 참기 힘들었는지 명치 끝에 침 한 대만 놓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병원의 어느 누구도 김옹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역사의 품에 안기기 위해 하루하루를 준비해 온 김옹이었지만 마지막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고갯길만큼은 아무래도 힘에 부친 탓일까.
오후 3시39분. 머리를 박박 깎은 항일청년 김학철이 63년 전 조선의용대 입대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 누워 있었다. 김학철의 항일정신은 역사를 뛰어넘어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독재와 맞선 김학철의 의기는 세월과 함께 더욱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만큼은 이미 거기에서 박동을 멈추고 있었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김학철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장례식에 초대받은 지인은 모두 12명. 그가 숨을 거둔 날 아침 김옹의 집에서는 아들 해양씨가 그의 죽음을 접한 지인들의 문상 요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이 우체국에서 종이상자를 사왔고 분골 과정을 거친 김옹의 유해는 이 상자에 담겼다. 변변한 영구차도 없이 승합차에 문상객을 싣고 옌지에서 투먼까지 26km, 다시 투먼에서 훈춘까지 50km를 2시간 만에 달려 훈춘시 영안진 앞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원산 앞바다행’이라고 쓰인 유골함을 아들 해양씨가 두만강에 띄웠다.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물은 85년을 항일과 반독재로 일관해 온 노혁명가의 유골을 비로소 고향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가 가사를 지은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울려퍼졌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한국에서 추석 연휴가 시작될 무렵,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김옹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래서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등 국내에도 수많은 독자를 가진 소설가이자 옌볜 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김옹을 기억할 만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주간동아’가 입수한 김옹의 사망 직전 마지막 생애와 장례 현장을 담은 사진은 평생을 항일투쟁과 김일성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에 바친 혁명가의 마지막 삶이 얼마나 고결하게 마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옹은 눈감기 20여일 전부터 곡기를 일절 끊고 자신의 죽음을 하나하나 준비해 왔다. 그의 마지막 생애를 김옹의 유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김옹의 아들 해양씨(52)의 증언과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의 ‘연변일보’ 기고문, 조선족 작가 류연산씨의 수필 ‘김학철 선생님의 쌍지팡이’, 그리고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김학철옹 인터뷰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마지막 서울 방문
김옹은 그동안 8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6월 석 달간 한국에 머무른 것이 그의 마지막 한국 방문이었다. 그러나 김옹 스스로 장기간 체류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김옹은 지난 6월 자신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한 윤세주 선생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윤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치른 기념학술행사에 초청 형식으로 참석했다. 윤세주 선생은 김옹이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항일투쟁을 벌일 당시 같은 분대의 상관이었다. 김옹은 윤선생의 부인을 ‘형수님’이라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김옹은 일정 도중 겨드랑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종양 발병 진단을 받았다. 곧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겨드랑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으나 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식도가 파열되는 사고로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병상에 누운 85세의 노혁명가는 건강 걱정은커녕 “독립운동가 중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는 심경을 내비쳤다고 한다.
석 달간의 입원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김옹은 퇴원을 고집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옌볜으로 돌아간 것은 8월31일. 이미 기력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김옹의 얼굴에서 모종의 결심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털어놓은 사실이지만, 한시라도 일을 안 하면 견디지 못하는 김옹의 성격에 비춰 석 달간의 입원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한다.
옌볜으로 돌아온 지 1주일도 안 되어 그는 미음조차 받아넘기지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쇠약한 몸과 희미해지는 정신을 채찍질하며 유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 그가 남긴 짤막한 유서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이와 함께 김옹은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한 ‘실무 지침’까지 내렸다.
‘부고를 내지 말라. 유체 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말라. 일절 부조금을 받지 말라. 골회(유골)는 두만강 하류에 뿌리고 남은 것은 우체국에서 우편용 종이 박스를 구해 여기에 담아 두만강물에 띄워 고향 원산으로 가게 하라.’
뿐만 아니라 김옹은 자신의 유골함에 써넣을 문구까지 정해주었다.
‘元山 앞바다行,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85년을 사는 동안 김옹과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굴곡진 역사와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었건만, 그는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한마디로 일축했다. ‘홍성걸’은 김학철옹의 본명. 김옹은 상하이로 건너가 조선민족혁명당원이 되는 순간부터 가족이나 지인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해 이름을 바꾸어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이 그의 유언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마지막 길에서 고향 사람들이 자신의 유골함을 알아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에서였을까. 그는 평생을 잊고 산 자신의 본명을 이제야 꺼낸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 조선의용대 추도가와 황푸군관학교 교가를 틀어달라고. 조선의용군 추도가는 그 자신이 가사를 쓰고 조선의용대 동료였던 류신이 작곡한 노래로 김옹의 대표적 애창곡이었다.
곡기를 끊은 지 열흘째. 외부와 접촉을 꺼린 김학철옹이 무엇인지 결심한 듯 카메라 앞에 앉았다. 조선의용군의 살아 있는 역사요, 옌볜 조선족의 표상인 김옹을 찾아 한마디라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언론인과 학자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집까지 찾아온 기자들마저 며칠씩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게 하던 김옹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서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닌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카메라 앞에서 마침내 무장 해제했다.
85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유언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극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겪고 있었다. 한마디 던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어렵게 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 : 오늘로 단식 열흘째시라면서요?
김 : 병원이니 주사니 하는 것 다 시시해. (휴-) 자기 한명(限命)을 아는 게 영웅이야, 영웅이라고. 깨끗이 죽는 게 낫지, 지저분하게 사는 것보다야. 자기 한명을 알아야지, 이걸 모르고 얼마나 더 살겠다고…, 난 그런 것 싫어. 노인네가 병들어 누워 텔레비전 보면서 ‘이 약 사와라, 저 약 사와라’ 하는 것, 그게 뭐 철없는 짓이야.
조 :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요.
김 : 그거 다 속인들이야.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하게 승복하고 가는 거야. (휴-). 게다가 나는 85세야.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우리 집사람하고 55년을 살았어.
조 : 선생님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김 : 내 생활신조에서 나오는 거지. 병원에 가 7∼8년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해 봤자 결국 죽는 거야. 난 내 장례식에 나랑 가장 친한 사람들로 딱 12명만 모았어. 며느리도 그날 학교 가는 날이면 출근하라고 했어, 학교가!(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며느리 염리나씨는 옌지 하남소학교 음악교사임).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사필귀정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나라가 망했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 싸워야지. 힘이 약하면 힘 닿는 데까지 싸우는 거야. 그러다가 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지(휴-). 그랬다가 남조선에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니까 평양으로 쫓겨왔지. 거기서 4년 있으면서 김일성이의 온갖 더러운 독재 행태를 보았지. 나는 그동안 김일성을 존중해 왔는데…. 그래서 내가 ‘금슬을 누가 파괴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노동신문에 썼지. 결국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거야. 중국으로 망명했어…. 그런데 모택동이의 대약진 때 3000명이 굶어 죽었어. 아무리 ‘모택동 만세’를 외쳐도 이건 말이 안 돼. 그러고서 또 1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왔지. 그 뒤로 계속 나는 반독재 투쟁을 해온 거야. 내 일생은 반독재로 끝나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싸웠어. 죽을 때까지 싸운 거야. 서울 가서 석 달 입원하고…, 이제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나는 굶으면 열이틀이면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며칠 더 가는 모양이야. 할 수 없지. 조용히 있다 죽는 거야. 원산 앞바다 고향 앞바다로 돌아갈 거야. …그런데 힘이 없어.
조 : 지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말씀만 해주시죠.
김 : 하려면 이야기가 긴데, 숨이 차 못하겠어. 어서 끝내줘.
조 : 건강하십시오.
김 : 고마워, 다시 만나자.
이것이 김옹과 세상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다시 만나자던 김학철옹의 말이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는 살아 있는 자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짤막한 인터뷰가 끝난 뒤 정확히 열하루 만에 김옹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집필이나 연구 등 한시라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김옹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못다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심정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에서 역사학자 염인호 교수(서울시립대)가 보내온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보고 전우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것은 숨을 거두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번쩍 들어 아들 해양씨가 책상에 옮겨놓자 말라 비틀어진 팔목을 들어 확대경을 들고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63년이나 지난 사진이다. 그러나 육신이 촛불처럼 스러져가는 상황에서도 김옹의 기억력은 초인적인 것이었다. 90여 명의 조선의용대원 중 얼굴이 가려진 단 2명만 제외하고는 전 대원의 이름은 물론 별명까지 확인해냈던 것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데다 기력이 소진되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면서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는 아픈 눈을 비비면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일을 내가 안 하면 영원히 력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 것이야.”
가까스로 작업을 끝낸 뒤 침대로 옮겨지면서 그가 가느다랗게 내뱉은 말이었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을 준비해 온 김학철옹은 이제 육신마저 죽음과 친구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빡빡 깎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제 전우들이 모두 가 있는 조선의용대로 복귀한다”는 말과 함께. 지금부터 63년 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삭발했다. 면도까지 마치자 파랗게 깎인 그의 머리 위에 이제까지 자식들은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던 깊숙한 칼자국이 드러났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맞아 찢어진 자국이었다. 김옹의 머리에 깊이 난 상처는 그 후 성성한 머리카락에 묻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훈장이 되었다. 그러나 비로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청년 김학철은 그날의 요동치던 역사로 돌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를 불러 관장을 해달라고 했다. 곡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관장을 한들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심정으로 김옹의 육신을 정갈하게 비워냈다. 그러고 나서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를 깨끗이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김옹은 한쪽 다리가 없다. 1941년 일본군과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나가사키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감옥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상당한 다리를 일절 치료해 주지 않았다. 결국 상처난 다리를 3년6개월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3년 반 내내 다리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상처에서는 구더기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김옹은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내던 역사의 한모퉁이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
이 웃음이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낙관이었을까. 이때부터 아들 해양씨의 눈물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눈빛이 마주칠 때면 김옹은 눈을 감아버렸다.
단식 21일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것만 벌써 9일째이다. 김옹은 이미 말을 잊었다. 언어를 구성할 최소한의 기력마저 잃은 것이다. 오직 손으로만 의사를 표시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부인 김혜원씨와 아들 해양씨에게는 침대맡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9월25일 새벽 2시. 김옹은 침대맡의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30년을 입어 구멍이 숭숭 뚫린 푸른색 중산복을 입혀 달라고 했다. 평생 목발을 짚고 다닌 덕에 윗옷 겨드랑이는 아예 해지고 없는 낡은 옷이었다. 평생을 입어온 이 푸른 옷은 이제 그의 수의가 될 모양이었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옌볜병원 간부병동 103호실. 이곳이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 곳이었다.
김옹은 고통을 참기 힘들었는지 명치 끝에 침 한 대만 놓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병원의 어느 누구도 김옹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역사의 품에 안기기 위해 하루하루를 준비해 온 김옹이었지만 마지막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고갯길만큼은 아무래도 힘에 부친 탓일까.
오후 3시39분. 머리를 박박 깎은 항일청년 김학철이 63년 전 조선의용대 입대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 누워 있었다. 김학철의 항일정신은 역사를 뛰어넘어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독재와 맞선 김학철의 의기는 세월과 함께 더욱 끓어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만큼은 이미 거기에서 박동을 멈추고 있었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김학철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장례식에 초대받은 지인은 모두 12명. 그가 숨을 거둔 날 아침 김옹의 집에서는 아들 해양씨가 그의 죽음을 접한 지인들의 문상 요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옌볜작가협회 김학천 주석이 우체국에서 종이상자를 사왔고 분골 과정을 거친 김옹의 유해는 이 상자에 담겼다. 변변한 영구차도 없이 승합차에 문상객을 싣고 옌지에서 투먼까지 26km, 다시 투먼에서 훈춘까지 50km를 2시간 만에 달려 훈춘시 영안진 앞 두만강가에 이르렀다.
‘원산 앞바다행’이라고 쓰인 유골함을 아들 해양씨가 두만강에 띄웠다.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물은 85년을 항일과 반독재로 일관해 온 노혁명가의 유골을 비로소 고향으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가 가사를 지은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울려퍼졌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