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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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 고용 미국인 로웰 ‘화성인’ 선포한 천문학자

  •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4-02-19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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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우주선을 통해 화성에 보낸 두 개의 로봇이 지금 이 순간에도 화성 표면에서 탐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화성에 물이 존재한다는 등의 새로운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화성인(火星人)이 허구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화성인이 존재할 것이란 믿음은 팽배했다. 만일 화성에 ‘사람’이 산다면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레 화성인을 묘사하기 위한 상상력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같은 화성인에 대한 상상과 자그마한 연관을 갖고 있다. 화성에 사람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 다름아닌 조선 정부가 고용한 최초의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문가 출신인 로웰은 1876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2년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첫 외교관계를 미국과 맺으면서, 이듬해 미국 공사를 맞이하는 조건으로 순회대사를 파견하기로 약조했다. 그것이 바로 조선왕조 최초의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다.

    민비의 조카 민영익(1860~1914)과 홍영식 서광범 3명이 대표였고 이들 외에 5명의 수행원이 따라갔다. 하지만 당시 영어를 할 수 있는 조선사람은 조선팔도에 단 한 명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영어가 가능한 중국인과 일본인 한 명씩을 고용했다. 이후 일본을 거치면서 바로 이 로웰이란 인물을 추가로 채용해 통역사 3명을 포함한 총 11명이 미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이런 연고로 조선과 친하게 된 로웰은 1886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란 책을 써서 서구에 이 ‘은둔의 왕국’을 소개하기도 했다.

    로웰은 그후 천문학자로 변신해 활약하면서 세계적 천문학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대단한 부자였던 그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로웰천문대’를 세우고 평생의 목표인 화성인 문제에 매달렸다. 그는 또 아홉 번째 행성인 명왕성 찾기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1916년 죽고 만다. 그렇지만 명왕성은 1930년 그의 천문학 연구를 돕던 제자 톰보가 발견해 결국 그의 꿈의 절반은 빛을 보았다.



    최초의 화성인에 대한 발상은 이탈리아 천문학자 지오바니 스키아파렐리의 화성관찰 논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화성 표면에서 관찰된 ‘계곡 같은 모양(canali)’을 지적했다. 이것을 프랑스 천문학자가 ‘운하’라 번역했고, 이것이 로웰 등에게는 ‘인공적인 운하’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결국 화성에는 그 운하를 파놓을 수 있는 대단한 지적(知的)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주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로웰은 1895년 ‘화성’이란 저술에서 화성인의 존재를 선포했고, 그것을 읽은 영국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역사가인 H.G. 웰즈는 1898년 ‘우주전쟁’이란 SF소설을 발표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화성인의 지구침략을 다룬 웰즈의 소설이 라디오를 통해 생방송되었을 때는 런던 시민들이 대피소동을 벌였을 정도로 파장이 컸다. 이것이 그 후 널리 유행한 우주인과 우주전쟁의 모델이 된 것은 물론이다.

    알고 보면 오늘 미국의 화성탐사는 바로 이 같은 과학자들의 상상력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역사 속의 한 자락에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역시도 조금은 더 관심을 가져도 될 법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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