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이 아니라 적어도 의료정책에 관한 한 그렇다는 말이죠. 현 의료보험 제도하에서는 국민은 선택의 자유가 없고 의사들은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의료정책을 ‘사회주의’라고 못박은 그는 국민을 위해 국민의 선택권이 보장되고 의료인들의 자율성이 인정되는 의료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의료정책이 전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국민을 위한 의료개혁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국민과 의사 모두의 불만을 사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제대로 된 진료를 받을 수 없고 의사들은 교과서대로 진료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의료보험이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의사들은 정부가 정한 심사기준의 노예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하향평준화하고 있는 정부의 의료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조제위임제도(의약분업)가 시작된 지 벌써 3년이 지난 만큼 이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주장한 대로 항생제 오·남용이 줄었는지, 비용이 줄었는지, 제약산업 및 약업계가 구조조정을 통해 발전했는지 등을 한번 평가해보자는 것이지요. 의사협회는 조제위임제도 대신 국민조제선택제도 도입을 주장합니다. 국민들이 약 받을 곳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현 의료제도가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시는데 너무 과격한 주장이 아닌가요?
“사회주의체제는 이미 사라졌지만 우리나라 의료정책은 여전히 사회주의 정책 일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부자조합의 돈을 가난한 조합과 나눠 쓰자는 취지로 통합된 공단이 부자조합에 남아 있던 돈마저 모두 까먹고 현재 빚만 남은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납품비리, 인사비리 등으로 직원 10여명이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지요. 이는 공단이 통합 이후 ‘거대 공룡’이 되어 전형적인 관료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회주의가 망하면서 겪은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으로 국민들은 보건복지부령이 정하는 방법, 절차, 범위, 상한에 따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의사들은 백양백색의 환자들을 보건복지부령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끼워 맞춰서 진료하도록 강요당하고 있고, 동시에 국민은 의료보험이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진료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복지부령은 물리치료의 경우 재진 시 요통은 한 달에 10일, 관절염은 한 달에 7일, 염좌(속칭 삔 경우)는 3일만 진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환자는 이 이상 병원에 가면 불법이고 의사는 이 이상 진료를 하면 부정청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통제하는 방식의 획일화된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없애자는 이야기 같습니다만, 대안은 있습니까?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자는 것이지요. 거대한 공룡이 돼버린 단일 공단을 해체해 여러 개로 만들자는 뜻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거나 건강보험공단을 광역화해서 분리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건강보험공단의 이사장을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등 국민의 감시기능이 강화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민이 내는 보험료가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알 수 있고 필요이상의 관리운영비도 줄일 수 있습니다.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문제도 충분히 검토될 수 있는 방안입니다.”
-현행 의료보험 대신 책임보험, 종합보험 방식으로 바꾸자고 주장하시는데, 도대체 어떤 뜻인가요?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니까 공보험을 없애자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의료보험에도 시장과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자는 게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현행 자동차보험처럼 공보험을 책임보험 형태로 전환해 필수서비스를 담당하게 하고 나머지는 종합보험 형태로 운영함으로써 국민들의 선택권을 보장하자는 이야기이지요. 필수적인 보장은 책임보험에 무조건 가입해 해결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보험회사에 종합보험을 가입하면 됩니다. 그러면 보험회사들이 서로 가입자를 늘리기 위해 서비스를 개선하고 친철해지지 않겠어요. 가끔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면 의료보험의 보장성이 약해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질 것이라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필수적인 부분에 대한 저소득층 보장 부문은 더욱 강화될 수 있지요. 전체적인 보장성이나 서비스가 모두 향상된다고 보면 됩니다.”
의료개혁을 위한 정책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틈만 나면 자료를 찾고, 연구에 몰두한다는 의협 김재정 회장.
“바로 그 점에 대해 의사들은 매우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의약분업 시행 당시 복지부 장관이었던 차흥봉씨가 ‘수가가 다섯 번 올랐는데 네 번은 원래 계획되어 있던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약가 마진을 수가로 전환해(이중 20%는 국민을 위해 급여 확대로 전환) 원가를 보전한 것이고, 세 번째는 의약분업 시행으로 처방료·조제료가 신설된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의료보험법을 국민건강보험법으로 바꾸면서 수가시스템을 전환한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정부와 시민단체는 의약분업 시행이 궁지에 몰리자 의료보험재정이 파탄했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그 원인이 의사들의 투쟁과 그에 따른 수가인상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나섰지요. 그 후 3년에 걸친 재정안정화 대책이란 이름으로 동네의원의 의료수가는 20% 이상 인하됐습니다. 이렇듯 명예와 돈 모두를 잃어버렸음에도 의사들이 마치 ‘허가 난 도둑’으로 인식되는 현 실정이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 경남 산청군 주민들이 의약분업 철폐 시위를 했는데, 의약분업이 반드시 철폐돼야 한다고 봅니까?
“아닙니다. 일단 의약분업에 대해 객관적인 재평가를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정부도 의약분업의 시행을 통해 분명 얻으려는 정책목표가 있었겠지요.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농민 노동자 노인 등이 직접 참여해 평가해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대목은 국민은 많은 돈을 더 내면서 매우 불편해졌다는 점, 의사들과 국민들 사이의 불신이 매우 커졌다는 점, 그리고 약국으로 가는 조제료가 많이 든다는 점 등은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산청군민 역시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민의 입장에서 국회 차원의 재평가위원회를 설치해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평가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의협이 주장하는 국민조제선택제도(선택분업) 아래에서도 항생제 오·남용을 막을 장치가 있습니까. 그리고 환자의 알권리를 보장할 수 있나요?
“항생제 오·남용의 근본적인 원인은 약사들의 불법진료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50년간 약사들이 질병이나 환자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채 진료와 투약을 해온 게 현실입니다. 의사와 약사 중 누가 항생제를 무원칙하게 사용했을 것 같습니까. 물론 약사들이 그렇게 진료하도록 만든 것은 약사들의 책임보다는 정부의 책임이 훨씬 큰 것이 사실이지만,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의약분업 시행으로 항생제 사용이 줄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항생제 사용이 감소한 것은 의약분업의 효과가 아니라 약제 적정성 평가의 효과입니다. 이는 의약분업과 전혀 무관한 정책이지요. 얼마 전 신문에도 이런 내용이 보도된 것으로 압니다. 환자의 알권리는 의약분업 시작 전에도 보장돼 있었습니다. 환자가 요구하면 얼마든지 처방전뿐 아니라 진료기록도 열람케 하고 복사해줍니다. 조제위임제도의 형태 변화는 환자의 알권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조제선택제도를 시행하면 약에 대한 선택권과 판매권이 의사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 경우 의약품 비리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게 질문한다면 거꾸로 지금 약품 판매권을 갖고 있는 약국이 렌딩비와 리베이트를 받고 있다는 말인가요. 약품 거래의 투명성은 조제위임제도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의약품 바코드 시행을 통해 유통구조를 개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의약품에 바코드를 붙이는 것뿐 아니라 모든 유통과정을 바코드로 인식해 투명거래를 보장해야 합니다. 아직 바코드를 만들지 않은 약품도 있고 심지어 약품 용량이 다른데도 같은 바코드를 사용하거나 바코드는 있지만 실제 인식은 되지 않는 가짜도 있는 실정입니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의약품의 바코드 시행을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의약품 바코드 정책만 제대로 정착된다면 약품비리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일반의약품 슈퍼마켓 판매도 주장하셨는데….
“그렇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약품 판매대가 카운터 밖에 있고 국민들이 약품을 골라서 계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해열제, 진통제, 소화제 등은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도 당연히 국민이 편리하도록 안전성이 보장된 일부 일반의약품은 슈퍼마켓에서 판매해야 합니다.”
2000년 8월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국민건강권 수호 집회에 참가, 의료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김재정 회장(왼쪽). 2003년 12월 시·도의사회 모임에서 의료개혁에 대해 역설하는 김회장.
“정부의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의 건강보험 분야 첫 페이지를 보면 ‘의료이용 억제를 위한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병·의원의 문턱을 더욱 높이겠다는 의미지요. 이 세상 그 어느 나라도 국가가 모든 국민의 의료이용을 억제시키는 방향으로 정책 개입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5개년 계획에 포함된 ‘목표관리제’에는 국가가 그 해 그 해 거두고 써야 할 보험재정의 총량을 미리 결정해놓고 의원급·병원급·종합병원급에 따라, 또 다른 방향으로는 다시 내과·외과·소아과별로 나눠 총량 범위 내에서 얼마씩 진료비를 나눠주겠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가 국민들의 의료이용 총량을 미리 결정하겠다는 결론인데, 이것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계약제를 통해 건강보험공단이 계약 대상 병·의원을 마음대로 선택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들에게도 건강보험공단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계약제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은 의사들의 사유재산을 침해하고, 불평등한 계약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의사들을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정책입니다. 결국 한국의료를 하향평준화함으로써 국민들이 받는 의료서비스의 질이 매우 낮았기 때문입니다.”
김회장은 인터뷰 중간중간 기자에게 “누가 가장 국민을 위하는 것 같냐”고 되물었다. 2000년 의사 집단폐업투쟁을 주도해 구속되기도 했던 그의 얼굴에는 삭발하고 머리띠를 묶었던 당시와는 다른 완벽한 정책대안에 대한 확신이 서려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의사들의 고민이 의사들의 주장대로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이 되길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과연 한국의 의사들은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돌아온 투사’ 김재정 의협 회장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