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2월11일 청와대에서 신임 이헌재 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
신임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월11일 기자회견에서 우리금융지주를 인수하기 위해 추진해온 3조원 규모의 ‘이헌재 펀드’(가칭)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금융기관을 하나둘씩 집어삼켜 온 외국자본의 대항마로 불리던 이헌재 펀드가 그의 입각으로 주저앉은 것. ‘사모펀드 매니저’로 변신했던 이부총리는 수개월 동안 금융계 안팎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부총리는 이날 “상당 부분 진행됐는데 공교롭게 이 자리에서 와서…”라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부총리가 사모펀드를 통해 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뒤 일부에서는 반(反)외국자본 전선의 중심에 선 게 아니냐는 평가를 했다. 그는 “이헌재 펀드를 끝내겠다”고 밝히면서 “외국계 자본을 배제하겠다는 국수적인 동기는 없었다”, “모건스탠리가 어드바이저로 참여했다”, “외국계든 국내든 민영화에 참여할 가능성을 열려는 의도였다”는 등 여러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지만, 초대형 토착자본의 등장을 바라던 인사들은 이부총리와 그의 측근들이 이헌재 펀드 시절 내뱉었던 주장이 향후 정책에 반영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그가 비록 날개를 펴지는 못했지만 이헌재 펀드의 취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절연할 것인가에 눈길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이헌재 펀드에 대한 시각 찬반 갈려
이부총리의 최근 행보는 과거와 사뭇 달랐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이부총리는 초대 금융감독위원장과 재경부 장관을 차례로 지내면서 외자유치 전도사로 명성을 날린 바 있다. 펀드 추진을 발표하자 기업을 헐값에 외국에 넘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해보려는 것 아니냐는 촌평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부총리가 추진하던 사모펀드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둘로 갈렸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산업자본의 금융산업 지배’를 우려하는 쪽에선 적절치 못한 시도로 여겼고, 대안연대를 위시해 ‘외국자본의 금융산업 지배’를 걱정하는 쪽에선 가치 있는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부총리에게 사모펀드에 대한 절연을 요구한 사람들 못지않게 사모펀드의 무산을 아쉬워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김민국 VIP투자자문 대표는 “이부총리의 개인적인 비즈니스가 중단된 것이 아니라 순수 토종 초대형 금융자본의 등장이 일시적으로 좌절됐다는 점에서 이헌재 펀드는 반드시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자본의 금융산업 지배는 우려할 만한 수준인 게 사실이다. 제일·외환·한미은행은 외국인이 대주주로 직접 경영에 참여한다. 국내은행의 대주주 노릇을 하는 외국자본 중 뉴브리지와 칼라일, 론스타는 대표적인 사모펀드. 뉴브리지는 1999년 말 제일은행을 단돈 5000억원에 인수했고, 지난해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는 투기펀드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인 칼라일 역시 한미은행을 되팔아 막대한 차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인천대 이찬근 교수는 “이젠 더 팔 은행도 없다. 똥 오줌 가릴 때가 아니다”면서 “토착자본의 육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했다.
외국계 펀드는 부동산 시장에도 공격적으로 진출, 스타타워(왼쪽, 론스타), 서울파이낸스센터 (싱가포르 투자청) 등 서울의 대형 빌딩들을 차지했다.
사실 이헌재 펀드가 계속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금융지주를 인수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금융지주가 투자자들에게 매력이 있는지 의문인 데다, 한 주체당 의결권이 4%로 제한되어 있는 등 관련 규제가 까다로워 편법을 동원하지 않으면 돈을 모았더라도 인수 자체가 어려웠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는 “연기금에 투자된 개인의 돈, 은행 예금자의 돈, 산업 자본으로 펀드를 구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난센스였다”면서 “혹여 인수를 하더라도 경영 과정에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 투신사 사장 역시 “펀드의 목적이 다분히 공공성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똑똑한 돈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을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헌재 펀드가 계속되었더라면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4% 규정을 지키려면 돈을 여럿으로 쪼개 투자 주체를 늘리고 경영권 확보에 나서야 하는 등 편법 시비와 특혜 시비에 휘둘렸을 공산이 크다. 결국 법적 제도적 규제가 사모펀드 추진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이부총리가 펀드 추진 과정에서 절감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환위기 시절 외자유치에 앞장섰다 토종펀드의 매니저로 거듭나고 다시 경제사령탑이 된 이부총리는 외자와 토종 가운데 어느 쪽에 힘을 조금이라도 더 실어줄 것인가. 좌초한 이헌재 펀드가 계속 진행됐다면 마주했을 난관에서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외국자본 득세 속 국내 큰손 필요성도 제기
한국의 대형빌딩과 금융기관을 삼킨 론스타같은 사모펀드나 파이낸셜빌딩을 인수해 짭짤한 수익을 거둔 싱가포르 투자청 같은 ‘큰손’을 한국에서 만들어보겠다는 게 이헌재 펀드의 출발점이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권성문 KTB 네트워크 사장, 황영기 삼성증권 사장 등 내로라하는 증권가 인사들이 현재 사모펀드 조성을 계획 중이다. 이헌재 펀드는 가라앉았으나 토종자본이 곳곳에서 싹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이헌재 펀드가 부딪혀야 했던 제도적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펀드가 성공하려면 정부의 규제 완화 조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
금융시장에 매물이 나오면 밖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재의 구조다. 국내엔 대형 금융기관을 인수할 만한 ‘큰손’이 없기 때문이다. 사모펀드를 통해 토종자본을 육성하는 게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해선 논란이 거세다. 일부에선 단순히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수준을 넘어서 외국은행이나 다국적기업을 인수할 정도의 자본력을 갖춘 토종펀드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토종펀드가 외국의 투기펀드와 다를 게 뭐냐”(한국펀드평가 우재룡 대표),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수주의에 불과하다”(김상조 교수)는 등 사모펀드를 통한 토종자본 구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찮다.
그렇다면 이부총리는 제2, 제3의 ‘토종펀드’에 어떻게 대응할까. 외국자본들은 한국정부가 관치를 통해 차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국내자본들은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일단 이부총리 취임사에 담긴 외환은행 등을 겨냥한 듯한 “내 이익만 챙기는 억지나 불장난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이 예사롭지 않다. 한 투신사 사장은 “부총리가 야인 시절 소신대로 사모펀드에 대해 공식, 비공식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에 대해 김상조 교수는 “이부총리는 ‘시장론자’보다 ‘관치주의자’에 더 가깝다”면서 “사모펀드식 해법에 미련을 갖게 되면 결국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