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표는 당시 박 대표에게 ‘큰 꿈을 이루려면 계보를 둬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을 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박 대표는 ‘계보 정치=구태 정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 대표는 기자에게 “사람을 끌어모아 세를 과시하는 정치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제게 그런 돈이 어디 있나요”라고 말했다. 2002년 박 대표는 12억여원의 재산을 신고했고 4억여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박 대표의 측근들은 “지금도 박 대표는 계파와 돈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2006년
2월28일 공개된 공직자 재산변동 내역에 따르면, 박 대표의 재산은 2005년에 비해 221만원이 늘어난 11억7000여만원이었다. 2002년과 비교해도 달라진 게 없다. 또한 제1야당의 수장이 되어 있는 현재도 박 대표의 ‘인맥’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아군 확장형’ 아닌 ‘나 홀로 공격’ 스타일
20여 개 모임을 두고 있는 고건 전 총리, 각계에 포진된 지인들의 면면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이명박 서울시장 등 다른 유력 대권 주자들과 달리 ‘박근혜의 사람들’은 베일에 가려 있다. “박 대표에겐 보좌관, 비서관을 뺀 측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박 대표는 2.5선의 국회의원 경험(98년 보궐선거로 정계 입문)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4년여 동안 ‘한나라당 쇄신운동 주도, 한나라당 탈당, 미래연합 창당, 한나라당 복당, 한나라당 대표 당선,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구원, 한나라당 대표 재선, 각종 재·보궐선거 압승, 한나라당 유력 대권주자로의 부상’이라는 화려한 길을 걷고 있다.
단기적으론 실패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 대표는 ‘정치 인생’을 건 여러 고비를 잘 넘겼고, 그러면서 자신의 위상을 키워나갔다. 이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싱크탱크 그룹이 곁에서 행보를 ‘코치’해주지 않고선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박 대표는 누가 사전에 일러준 대로 외워서 그 말만 한다”는 ‘200자 공주’라는 악평도 이런 의구심에 기초한 것이다.
대단한 조언자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점은 박 대표의 ‘신비감’을 더하는 요소다. 이를 두고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인기 있는 정치인 뒤엔 반드시 유능한 사적 네트워크가 있다”는 고정관념이 빚은 오해라는 것이다.
그는 “박근혜식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대중 지향성’이다. 아버지의 옛 사진을 꺼내든다든지, 사학법 장외투쟁을 관철한다든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인의 퍼포먼스, 결단을 대중에게 직접 평가받겠다는 의지다. 자연히 ‘세 불리기’식 인적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은 줄어든다.”
김무성·유승민·전여옥 의원, 이병기 여의도 연구소고문, 이성헌 제2 사무부총장, 진영 전 대표비서실장(왼쪽부터).
유력 인사를 모아 ‘아군 진지’를 확장해나가면서 차근차근 고지로 오르기보다는 ‘나 홀로’ 대중의 바다로 뛰어드는 스타일, 정형화된 싱크탱크로부터 세련된 보고를 받기보다는 대중과 지지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여 ‘감성 정치’라는 비판도 감수하는 스타일이 박근혜식 정치라는 것이다. 그는 “박 대표의 최측근은 싸이월드 홈페이지의 박 대표의 1촌들”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나라당 내부와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박 대표를 찾아와 정보와 아이디어를 주는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근혜 대표가 주변 인사로부터 조언을 받는 제1 원칙은 ‘한나라당 공조직’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박 대표의 참모진은 이회창 전 총재 특보를 지낸 김선동 비서실 부실장, 박 대표의 정계입문 때부터 함께 일해온 이재만·이춘상 보좌관, 정호성 비서관 등이다. 박 대표는 대표 특별보좌관(특보)을 두고 있지 않다. 따라서 대표 직속 참모진 외엔 박 대표가 임명한 전·현직 당직자들, 이들이 운영해오고 있는 당 기구가 박 대표의 실질적 싱크탱크로 분류되고 있다.
유승민 전 당 대표 비서실장, 진영 전 대표 비서실장, 전여옥 전 대변인, 김무성 전 사무총장, 유정복 비서실장, 이계진 대변인, 김재원 기획위원장, 김기춘 여의도연구소 소장 등이다. 원외 인사로는 이성헌 전 비서실장, 이병기 여의도연구소 고문, 윤여준 전 의원, 박세일 전 의원이 꼽힌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 박 대표의 신임을 받으면서 현안에 대해 박 대표에게 조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학송, 곽성문, 김정훈, 이종구, 이혜훈, 장윤석 의원은 박 대표에게 경제, 법률 문제 등과 관련한 조언을 하는 그룹으로 분류된다.
당내에선 특히 유승민·전여옥·김재원 의원, 이병기 고문을 주목한다.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내 국가혁신위원회에서 이명박 미래분과위원장은 ‘경부 운하’ 구상을 올렸으나 대선공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조정 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이 전 총재의 핵심 측근인 유승민 의원이었다. 이때 이 시장은 측근에게 “괜찮아. 다음번에 하면 되지”라며 서운함을 표했다. 이 시장은 최근 경부 운하를 차기 대선공약으로 내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 중국 방문에서 박 대표는 후진타오 주석 등 주요 인사들과 면담했다. 유 의원은 이들 외국 순방에서도 조정 역을 맡았다. 박 대표가 당 국제위원장으로 임명한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도 외교 부문에서 박 대표를 자문한다.
박근혜 대표-전여옥 의원의 관계는 노무현 대통령-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의 관계와 비교되기도 한다. 기획위원장인 김재원 의원은 박 대표에게서 “분석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뒤 박 대표와 수시로 만나며 직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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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정수장학회 사무실.
한나라당 밖 인사로는 방석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표학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이 박 대표에게 자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덕우·신현확 전 총리, 김만제 전 의원 등 대구·경북 출신 경제계 거두도 박 대표와 접촉한다. 김용환 전 자민련 총재, 김치열 전 법무부 장관 등 정치, 경제, 사회 각계에 포진되어 있는 박정희 정권 관련 인사들도 박 대표에게 호의적이다.
박 대표는 최근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1962년부터 정수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상청회’는 박 대표의 우군세력으로 분류된다.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은 3만여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경제·법조·학계·언론계 등 각계에서 사회 지도자급 인사가 됐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 김기춘 의원도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이다.
1979년 3월 국제 학술·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설립된 서울 신사동에 있는 ‘한국문화재단’은 박 대표와 연관이 깊다. 2002년 2월 당시 박 대표의 한나라당 탈당 기자회견문도 한국문화재단에서 작성됐다.
유럽-코리아 재단은 2002년 5월 박 대표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의 면담을 주선한 바 있다. 당시 박 대표는 이 재단의 이사였다. 장자크 그로하 이사장 등 이 재단 관계자들은 북한 측과 끈끈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최근엔 “박 대표가 외부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한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하면서 이들 교수 그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방석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에 대해선 한나라당 내에서 “지방자치제도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박 대표가 의견을 듣는 인물”, “이회창 후보 시절 때부터 이 후보의 싱크탱크인 부국팀에 직함이 있었던 인물”이라는 등의 소문이 났다. 그러나 방 교수는 이를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상자기사 참조).
박 대표는 다른 대선주자들과 달리 비선 및 측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 대표가 된 뒤에도 이 태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박 대표의 대선 캠프는 제1야당의 대표답지 않게 단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