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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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병력에 사전 발포 명령 있었나?

국내 치안 유지 최루가스 사용 집중 훈련…“소요진압 반감, 내부 발포명령 가능성” 시사

  • 입력2005-05-31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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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전사 병력에 사전 발포 명령 있었나?
    한국군이 우발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아래 병력이동을 미군 사령관에게 통보해 왔음(advised). 현재 한미 야전군(CFA) 산하에 있는 제13 특전 여단이 5월8일자로 임시 임무 수행을 위해 서을 남동쪽의 특전사령부로, 현재 한국군 제1군 산하에 있는 제11 특전 여단이 5월10일자로 김포 반도로 이동해 제1 특전 여단과 같이 주둔하게 될 것임. 이 2개 여단의 총 병력 2500명은 학생들의 데모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중임.

    미군 사령관은 또한 포항에 있는 한국군 해병대 1사단이 대전-부산 지역에 투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려왔음. 해병대 1사단은 한미연합사령부(CFC)의 작전 통제 하에 있으며, 이동 시에는 미군의 승인을 받아야 함. 현재까지 병력 이동에 대한 승인 요청은 없으나, 요청이 있을 시 유엔군 사령관(CINCUNC)은 병력 이동에 동의하게 될 것임.

    5월10일 이전에 계엄령을 해제하지 않을 경우 5월10일을 기해 가두 시위를 하겠다는 학생들의 발표를 한국군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명백함.’

    1980년 5월7일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미 국무장관 앞으로 타전한 2급 비밀(Secret) 텔레그람의 전문(全文)이다. 이 비밀 전문을 급전 (immediate)으로 접수한 국무장관실은 일주일 후인 5월14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백악관 상황실로도 타전했다.

    1997년 4월3일에 비밀 해제된 이 전문의 제목은 ‘한국군 특전단 병력 이동.’ 영문 세 단락 20행짜리의 이 짧은 전문 한편은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사태를 조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자료며,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과 관련, 당시 미국이 취했던 입장과 태도를 밝혀주는 귀중한 1차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 전문에 따르면 신군부는 학생 데모를 진압하기 위한 2개 특전 여단의 서울 이동을 사전에 미국에 통보했으며, 미국은 이 특전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았다.

    또 이 전문에 따르면 한미 야전군 지역에 있는 13여단이 서울 남동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의정부 주둔 병력이 특전사령부가 있는 성남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한국군 1군의 11여단, 즉 원주 주둔 병력은 김포로 이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방의 2개 여단 병력이 서울 외곽으로 이동 집결해, 유사시 서울로 투입된다는 계획이다.

    포항 주둔 해병대 1사단의 병력 이동과 전방 특전 여단의 병력 이동의 성격을 이 전문은 명백하게 구분해놓고 있다. 즉, 해병대 1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 하에 있으므로 병력 이동 시 미군의 승인(approval)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특전 여단의 이동에 대해서는 미군의 승인 여부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병대는 미군의 작전 통제권에 들어가 있지만 특전 여단은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위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한국군이 미군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을 ‘알려왔다’(advised)는 표현을 썼다. 작전통제권이 실질적으로 미치는 병력이라면 ‘알려왔다’는 비공식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시 모든 한국군은 미 8군사령관의 작전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군의 특전 여단은 기본 성격상 시위 진압이라는 특수 임무를 맡고 있어 실제로는 한-미 간의 묵시 하에 한국군이 독립적으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병력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방어라는, 역시 특수 임무를 맡고 있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에 대해 한국군이 독립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11·13 특전 여단은 물론 특전사령부 소속이다. 특전사령부는 사령본부, 통신업무대 등 4개 직할대와 1, 3 공수여단 등 7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투입되는 이 특전사 병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건은 미 국방부의 1980년 5월9일자 비밀문서다.

    ‘특전사의 모든 여단 병력에 비상이 걸렸음. 13여단은 5월6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11여단의 제62대대는 5월7일 서울로 이동했음. 이 11여단 62대대가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대대 병력임. 원주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11여단 소속의 제61대대와 제62대대는 서울 이동 전, 광부들의 소요 사태에 대비해 대기 상태에 있었음.

    인천에 있는 제5여단 병력을 수도권 지역 병력으로 감안할 경우, 제7여단만이 유일하게 서울 지역에서 떨어져 있는 병력임. 제7여단 병력은 유사시 전주 및 광주 지역 대학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1여단은 5월4일 일요일에 참모-지휘관 모임을 가진 바 있음.

    병력의 서울 이동이 가장 중요한 주제임. 11여단 및 13여단 주둔 지역의 잔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함. 3개 대대로 구성된 이 11·13여단은 특전사령부 내에서 가장 작은 규모임. 나머지 5개 여단은 각각 4대 대대를 가지고 있음.

    특전사의 모든 단위 부대는 소요 사태 진압을 위한 집중 훈련을 받아왔음. 특히 최루가스 사용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아왔으며, 소요 진압을 위한 기타 특수 장비로는 정규전 헬멧 위에 착용하는 스크린 마스크가 포함되어 있음.

    제 606대대로 추정되는 1개 대대는 특수 훈련을 받았음. 이 부대는 소속 병력 모두가 머리를 기르고 있으며 작업복에 전혀 어울리지 않음. 이 병력이 학교 구내에서 활용될 병력인지는 모르겠음.

    많은 사람들이 특전사 병력에 부과된 국내 치안의 역할에 대해 점점 더 싫증을 느끼고 있음. 1979년 부산-마산 소요 사태 당시 파견된 특전사 소속 장교와 사병들은 ‘머리를 깰’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의지도 있었음.

    가장 최근 원주에서 대기 상태에 있었을 때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음. 광부들의 의견이 옳다는 의견들을 피력한 바 있음. 광부들의 임금 인상 요구는 옳다는 것이었음. 학생 데모 진압 활동에 대해서는 이와 다소 다른 견해이긴 하나 적극적인 자세는 아님. 특전사가 학생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음.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특전사 내의 기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임.’

    이 문건은 특전사 장교와 사병 내부에서 국내 치안 담당 임무, 즉 소요 사태 진압에 대한 반감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특전사가 학생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위 사태에 대비해 특전사 내부에 발포 명령이 내려지는 것도 가능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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