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학년도 대학입시 수시모집 고교장 추천 전형의 지필고사(논술고사)가 지난 10월23일 실시됐다. 지난해 논술이 동-서양 고전에서 지문을 제시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시민, 환경, 사회정의 실현 등 우리 삶과 밀접한 문제가 나온 것이 특징이다.
다음은 서울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한 송영훈군(순천고 3년)의 논술 답안과 이에 대한 전문가 조언(오송식·광양제철고 국어 교사)이다. 답안의 경우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이므로 실제 제출된 답과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정 대학의 문제이긴 하나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서 보편적인 ‘사회정의’를 다뤘다는 점에서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조언(1)
논술을 연습하면서 족집게식으로 특정 유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논제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에서 출제된다. 이것은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출제 원칙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의 수준을 넘어서거나, 궁벽하고 기이한 데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문제 자체의 난이도가 어렵지 않을지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번 서울대 수시모집 법대 문제도 까다로워 보이지만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언(2)
생활 속의 사례들을 통해 ‘불의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그것은 논리적 약점을 지니기도 쉽고, 평범함의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칼 든 강도들이 한 시민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면, ‘불의를 감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 나서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무모한 희생을 쉽게 감수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그러나 ‘미시적 접근’ 논리로는 ‘나서지 못함’은 ‘불의의 감수’로 비판받아야하고, 나아가 시민들은 ‘용감히 나서지 못한 자’들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 또한 ‘불의의 감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논제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고 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선택했을 것으로 보이는 ‘생활 속의 사례’들은 앞에서 논의한 함정 말고도 평범함과 상투성의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많다.
○조언(3)
개성과 독창성은 쟁점 사항의 어느 쪽 입장에 서는지의 선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논증의 과정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문화상대주의-절대주의 논쟁’에서는 대부분 ‘상대주의’를 선택한다. 그쪽이 오늘날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대세(大勢)이기 때문이다. 이때 개성과 독창성을 내보이려고 굳이 ‘절대주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언(4)
시의적절성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시사적 사례를 들어야 한다면 최소화하여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시사문제는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기 이전의 진행상황이 많으므로 사실논거로서 시비의 소지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것은 다른 학생이 많이 인용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식상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남북 문제’가 나오면 대부분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정상회담‘ ‘6·15선언’ ‘이산 가족 상봉 장면’ ‘경의선 철도 기공’을 사례로 들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채점위원들 앞에 놓인 논술 답안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몇 편을 읽은 다음부터는 답안지에서 해당 부분의 첫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하품을 하면서, 대략 끝날 지점까지 뛰어넘어버릴 것이다. 상투성의 문제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남들이 많이 쓰면 그것의 출생 성분이 아무리 고결하고 참신하다 해도 이미 평범함과 상투의 범주에 속해 버리는 것이다.
‘불의를 방관하지 않고 그에 맞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제시문에서 제시되는 두 개의 명제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영훈군이 여기서 두 가지 점(그 중에서도 두번째 것)에 주목한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착상하기 힘든 것인데, 이를 버리지 않고 활용한 점이 높이 살 만하다.
상식적으로 추론해 보면, 제시문의 필자는 이후 논의과정에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방법적인 면에서 정의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식의 ‘정의 수호를 위한 불의’(폭력 등)의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두번째 쟁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첫번째 쟁점으로만 이해하고 논술했을 것이다. ‘두번째 쟁점’ 파악은 필자의 주장(글의 주제)을 논리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불의를 방관하지 않기 위한 대항에 ‘불의를 행하는 것’까지도 용인할 수 있다. 이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훈군의 ‘칼 포퍼’ 사례 논거는 지적이고, 사고의 깊이가 있으며, 정확하게 상황에 일치하여 글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평가(2)
논술지도를 할 때 ‘논의의 핵심에 직진(直進)하는 서론’을 강조한다. 반대 개념은 ‘에둘러 가기 서론’이다. 논술력이 약한 학생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서론’ 부분에 잔뜩 힘을 쏟아 붓고(시간적, 정신적으로) 서론을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글은 올챙이 형태의 기형아가 되고 만다. 심한 경우 꼬리 부위가 아예 잘려버린 것들도 허다하다. 시간적 체력적 안배를 고려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논술실력이 좀 늘면 거창하게 서두를 꺼낸다. ‘급변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의 역사가 시작 이후’ 운운하는 게 에둘러 가기 서론의 전형이다.
하지만 짧은 논술에서는 거창하고 원대한 서두가 아니라 논의하고자 하는 화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작고 구체적인 서두 즉, 논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핵심에 직진하는 서론’은 작고 가볍기 때문에(또는 논의하고자 하는 논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므로) 끌어가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도 영훈군의 글은 깔끔하게 시작된다. 이 정도라면 논술에서 최상위점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서울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한 송영훈군(순천고 3년)의 논술 답안과 이에 대한 전문가 조언(오송식·광양제철고 국어 교사)이다. 답안의 경우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이므로 실제 제출된 답과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정 대학의 문제이긴 하나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서 보편적인 ‘사회정의’를 다뤘다는 점에서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조언(1)
논술을 연습하면서 족집게식으로 특정 유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논제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에서 출제된다. 이것은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출제 원칙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의 수준을 넘어서거나, 궁벽하고 기이한 데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문제 자체의 난이도가 어렵지 않을지 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번 서울대 수시모집 법대 문제도 까다로워 보이지만 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조언(2)
생활 속의 사례들을 통해 ‘불의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그것은 논리적 약점을 지니기도 쉽고, 평범함의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칼 든 강도들이 한 시민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면, ‘불의를 감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모두 나서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무모한 희생을 쉽게 감수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그러나 ‘미시적 접근’ 논리로는 ‘나서지 못함’은 ‘불의의 감수’로 비판받아야하고, 나아가 시민들은 ‘용감히 나서지 못한 자’들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 또한 ‘불의의 감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논제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고 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선택했을 것으로 보이는 ‘생활 속의 사례’들은 앞에서 논의한 함정 말고도 평범함과 상투성의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많다.
○조언(3)
개성과 독창성은 쟁점 사항의 어느 쪽 입장에 서는지의 선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논증의 과정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문화상대주의-절대주의 논쟁’에서는 대부분 ‘상대주의’를 선택한다. 그쪽이 오늘날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대세(大勢)이기 때문이다. 이때 개성과 독창성을 내보이려고 굳이 ‘절대주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언(4)
시의적절성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시사적 사례를 들어야 한다면 최소화하여 활용하도록 권장한다. 시사문제는 완전한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기 이전의 진행상황이 많으므로 사실논거로서 시비의 소지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것은 다른 학생이 많이 인용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식상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남북 문제’가 나오면 대부분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정상회담‘ ‘6·15선언’ ‘이산 가족 상봉 장면’ ‘경의선 철도 기공’을 사례로 들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채점위원들 앞에 놓인 논술 답안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몇 편을 읽은 다음부터는 답안지에서 해당 부분의 첫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하품을 하면서, 대략 끝날 지점까지 뛰어넘어버릴 것이다. 상투성의 문제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다. 남들이 많이 쓰면 그것의 출생 성분이 아무리 고결하고 참신하다 해도 이미 평범함과 상투의 범주에 속해 버리는 것이다.
‘불의를 방관하지 않고 그에 맞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제시문에서 제시되는 두 개의 명제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영훈군이 여기서 두 가지 점(그 중에서도 두번째 것)에 주목한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착상하기 힘든 것인데, 이를 버리지 않고 활용한 점이 높이 살 만하다.
상식적으로 추론해 보면, 제시문의 필자는 이후 논의과정에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방법적인 면에서 정의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식의 ‘정의 수호를 위한 불의’(폭력 등)의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그 이후의 ‘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두번째 쟁점’을 포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첫번째 쟁점으로만 이해하고 논술했을 것이다. ‘두번째 쟁점’ 파악은 필자의 주장(글의 주제)을 논리적으로 강화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불의를 방관하지 않기 위한 대항에 ‘불의를 행하는 것’까지도 용인할 수 있다. 이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증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영훈군의 ‘칼 포퍼’ 사례 논거는 지적이고, 사고의 깊이가 있으며, 정확하게 상황에 일치하여 글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평가(2)
논술지도를 할 때 ‘논의의 핵심에 직진(直進)하는 서론’을 강조한다. 반대 개념은 ‘에둘러 가기 서론’이다. 논술력이 약한 학생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서론’ 부분에 잔뜩 힘을 쏟아 붓고(시간적, 정신적으로) 서론을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글은 올챙이 형태의 기형아가 되고 만다. 심한 경우 꼬리 부위가 아예 잘려버린 것들도 허다하다. 시간적 체력적 안배를 고려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논술실력이 좀 늘면 거창하게 서두를 꺼낸다. ‘급변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의 역사가 시작 이후’ 운운하는 게 에둘러 가기 서론의 전형이다.
하지만 짧은 논술에서는 거창하고 원대한 서두가 아니라 논의하고자 하는 화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작고 구체적인 서두 즉, 논의 초점으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핵심에 직진하는 서론’은 작고 가볍기 때문에(또는 논의하고자 하는 논점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므로) 끌어가기가 쉽다. 그런 점에서도 영훈군의 글은 깔끔하게 시작된다. 이 정도라면 논술에서 최상위점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