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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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세대 핫이슈는 ‘감각의 제국’

폭력, 성폭행 등 ‘쇼킹’ 사건에 민감…인터넷 확산의 필연적 ‘성장통’ 분석도

  • 입력2005-05-31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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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세대 핫이슈는 ‘감각의 제국’
    인터넷을 달구는 핫이슈가 ‘서지혜양 사건’뿐일까. 지금 사이버스페이스에선 여론재판의 ‘불꽃놀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완벽히 검증되지 않은 게시물에 혹한 네티즌들의 경도된 행태는 그칠 줄 모른다.

    “지금 저는 모든 것을 말하려 컴(PC)을 잡았습니다…우선 애인과 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최근 넷 상에서 가장 ‘쇼킹’한 이슈로 떠오른 일명 ‘H고시학원 강사 성폭행 사건.’ 개요는 이렇다.

    서울 노량진 H고시학원 영어강사 L씨(36)가 지난 9월28일 자신의 제자 K씨(24·여)를 모텔로 유인해 성폭행했다. K씨는 올 3월부터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해온 이 학원 수강생. 며칠 뒤 뒤늦게 사실을 알아챈 K씨의 애인 J씨(27)는 L씨와 학원측에 이를 항의하던 중 합의문까지 작성했으나 이후 L씨의 태도가 급변한 데 격분, 결국 10월8일 H학원 홈페이지에 사건의 전모를 올렸다는 것. 이 글은 A4용지 9쪽 분량의 장문이다.

    글을 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엄청났다. L씨와 학원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넘치면서 게시판은 곧 폐쇄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글이 ‘퍼온 글’ 형태로 넷 상에서 일파만파로 번져 이 문제는 지금도 네티즌들 사이에 격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화간이다” “아니다, 명백한 강간이다” “모텔로 따라간 K씨에게 과실이 있다” “계획적인 범행이다.”

    공방을 유도한 셈이 된 J씨는 기자에게 “너무 억울해 글을 올렸을 뿐 딴 의도는 없었다”고 답했다. 사회 통념상 J씨의 행동은 정당한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인터넷을 타고 확산된 사건의 파장이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훨씬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해냈다는 점.

    특히 글을 올린 J씨가 한 사이트에 ‘L쭛쭛 죽이기’란 카페를 만들면서 L씨의 실명과 학원명을 그대로 못박아 H학원도 큰 피해를 보고 있다. H학원 관계자는 “이미 대대적인 수강료 환불사태가 벌어져 수천만원의 손실을 입었다. 실추된 학원 이미지를 어떻게 회복할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H학원과 이름이 똑같은 대구의 H고시학원도 또다른 피해자다. 이 학원 직원은 “L씨가 거기 근무하느냐, 문제의 학원이 거기냐는 등의 전화가 대구와 서울에서 잇따라 걸려와 적잖은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심지어 네티즌 H씨는 10월19일 J씨의 글을 청와대 공개민원 게시판에 옮기면서 “H학원은 대구에 있고 학원 게시판에 J씨의 글이 올라 있었다”고 ‘거짓말’까지 적어놓았다. 취재 결과 대구 H학원 홈페이지엔 원래 게시판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K씨의 고소로 사건을 수사한 노량진경찰서 홈페이지에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니 수사 상황을 공개하라” “L씨는 매장돼야 한다” “빨리 수사하라”는 등 네티즌들의 ‘주문’이 꼬리를 물었다. 담당형사 송기철씨(32)는 “규정상 게시판 글에 대해서도 일일이 답변을 해줘야 돼 업무에 차질이 많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현재 사건은 인천지검으로 넘어간 상태. 기자는 아직 불구속 상태인 L씨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대답이 없다. 지난 1월부터 H학원에서 일해온 그는 사건 직후 ‘퇴출’됐다. 해직 여부를 떠나 어쨌든 수많은 사이트에 실명이 거론됨으로써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L씨의 명예가 훼손된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J씨의 글은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고 ‘L쭛쭛 죽이기’ 카페에서도 네티즌의 공방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11월17일 현재 카페 회원은 5300여명,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글만 8500건을 넘어섰다.

    네티즌의 ‘아크로폴리스’인 인터넷이 ‘감각의 제국’으로 전락한 사례는 또 있다. 지난 10월21일 청와대 인터넷신문고 ‘토론광장’에 처음 등장한 ‘교사부인 월급 하소연.’ 전주의 한 교사 아내라고 밝힌 이 주부는 ‘(컴퓨터) 자판에 눈물과 한숨이 가득합니다’란 제목의 글에서 “교사경력 13년 된 남편 월급이 228만원, 공제금을 뺀 실수령액은 180만원, 하지만 생활비 지출은 190만원으로 매달 10만원씩 모자란다”며 한달치 생활비 지출명세까지 밝히며 ‘적자 인생’을 호소했다.

    그러나 글을 접한 네티즌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글쓴이에게 날아갔다. 가뜩이나 침체된 경제로 폭발 직전이던 네티즌들의 분노가 ‘교사부인 죽이기’ 양상으로 흐른 것.

    “배터지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74만원짜리 인생이다” “남편 교사 그만두게 하고 월 238만원 주는데 보내라” “배부른 돼지의 헛소리” “웬 엄살?” 등 원색적 비방과 욕설이 담긴 ‘굴비’(리플)가 빗발쳤고 글이 전주시청 등 다른 사이트로 떠돌면서 잇따라 ‘사이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하소연의 ‘실체’는 증발해버린 셈이다.

    논란이 예상되는 글을 ‘생각없이’ 올려 소모적 논쟁을 부추긴 경우도 있다. 일명 ‘나우누리 K양 사건’은 군 가산점 폐지로 최근 민감해진 남녀 성대결 논쟁을 정면으로 건드려 논란을 불렀다. 11월8일 K양(중2)이 ‘나우누리’ 게시판에 올린 글의 요지는 “남자들 군대 가서 힘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월급도 받더라, 돈 받고 복무하는 주제에 뭐가 고생이냐”는 것.

    이에 자극받은 남성 네티즌 중 일부는 “군대 월급이 1만~2만원 수준이란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며 K양의 ‘철없음’을 점잖게 지적했지만 상당수 네티즌들은 가차없이 ‘언어폭력’을 가했다. 지극히 사적인 생각을 글로 올려 N세대의 즉흥적 흥분을 불러일으킨 케이스다. 글쓴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재단’되는 이런 역기능이 치유불가능한 ‘난치병’이라기보다 인터넷 확산과정에서 필연적인 ‘성장통’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성장통’의 치유를 어렵게 하는 병리적 요소 또한 존재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이트 운영자의 토로.

    “인터넷은 본질적으로 감성매체다. 때문에 거의 모든 사이트가 조회 수에 목을 맨다. 네티즌의 눈을 붙들어매는데 ‘존재의 의의’를 찾는 상당수 운영자들은 논란거리를 방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정능력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연중 무휴인 ‘인터넷 법정.’ 이곳에선 어떤 사안이라도 ‘단죄’할 준비가 돼 있는 ‘법복없는 판관’들이 24시간 대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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