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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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시대를 노래하다

  • 입력2005-06-01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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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유시인 시대를 노래하다
    ‘하루 종일 굶다가 늦은 밤/ 허겁지겁 밀어 넣은 찬밥 덩이처럼/ 막상 마주하면 목이 메이는 사람’이라고 시인 정지원(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글 주인)의 노래말을, ‘조국과 청춘’ ‘노래마을’을 거친 광주세대 손병휘는 따뜻하게, 그리고 그윽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강직하게 투명한 통기타 사운드에 얹는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서구의 어떤 염세주의 철학자는 말했다지만 ‘본디 시와 노래는 한몸이었느니라’는 고졸한 소리가 이 음반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통기타, 혹은 하모니카 하나를 메고 삶과 자연과 죽음을 이야기하던 음유시인은 이윤 동기의 시장 논리에 처형당했다. 이제 가난함은 긍지가 아니라 수치이며 죄악인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앨범의 주인공은 이 황폐한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도종환, 안도현, 류시화, 이정하 같은 서정시인과 김현성, 백창우 같은 싱어송라이터들과 더불어 말과 소리의 순결하고 싱싱한 혼인식을 치러낸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네’의 명징한 통기타 스트로크의 여울을 지나 ‘속눈썹’의 위무를 받고 ‘그대를 만나기 전에’의 소박한 구애의 기쁨을 맛보고 나면 ‘아름다운 얼굴’의 슬픈 분노의 과격함까지도 어느덧 수용하는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손병휘의 기습적인 이 앨범은 70년대 말 긴급조치의 문화적 암흑기에 홀연히 바람 부는 강가에서 작은 모닥불을 지폈던 음유시인 조동진의 데뷔 앨범을 상기하게 한다. ‘행복한 사람’ ‘긴긴 다리 위에 저녁 해 걸릴 때면’ 등을 담은 이 침잠의 노래집은 파시즘과 매너리즘이 불륜에 빠진 10·26 정국의 아스라한 등대가 되었다.



    조동진의 깊은 우물과 같은 울림은 그 자체로 야만과 속물적 경향에 대한 침묵의 반대 증언이 아니었던가.

    조동진은 과작(寡作)의 완전주의자였다. 그는 60년대 후반에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통기타 열풍이 기세를 올리던 70년대 내내 양희은, 서유석, 김세환 등에 자신의 노래를 제공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앨범을 발표한 것은 서른을 훌쩍 넘긴 1980년 벽두에 이르러서였다. 그의 많지 않은 단어 하나하나에 온 정신의 무게가 실리는 것은 단지 그의 목소리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계에서 포착해내려는 시선의 인내심 때문이다.

    물론 손병휘의 데뷔앨범엔 조동진이 구축한 견인주의의 견고함이 결여돼 있다. 대신 여기엔 시민 정신의 건강함과, 아름다움과 정의에 대한 경의가 풋풋하게 피어오른다. 마지막 트랙의 노래 ‘난 언제나’의 서두, 곧 ‘내 노래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난 언제나 이 자리에서 노래 부르리’라고 씩씩하게 외친 것처럼 손병휘에겐 광주와 6월항쟁을 거쳐온 80년대 세대의 집념이 있다.

    이 앨범에 등장하는 악기 연주들은 일급 연주자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란한 녹음 스튜디오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 앨범은 올해의 명작이다. 여기엔 우리가 음악에서 제공받아야 할 것 중 성적 충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다만 무너진 배급 시스템 때문에 이 마이너리티의 앨범을 인터넷과 공연장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와 그의 노래가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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