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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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야 산다 … 趙-李의 ‘9년 전쟁’

‘대권’ 겨냥 총선부터 신경전…97 대선 레이스 등 고비마다 라이벌

  • 입력2006-04-19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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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밟아야 산다 … 趙-李의 ‘9년 전쟁’
    3월22일 오후 대구 실내체육관. 8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국민당 5개 지구당 합동창당대회가 열렸다. ‘전략지역’인 영남에서조차 지지도가 뜨지 않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민국당이 TK(대구-경북) 공략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대회에서 이수성상임고문은 ‘TK대망론’을 펴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다음에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당의 얼굴인 조순 대표최고위원의 모습은 어쩐 일인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대표측은 “70 노구를 이끌고 연거푸 전국의 지구당 행사에 참석하느라 감기 몸살로 병원신세를 져야 할 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이수성 띄우기’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이에 앞서 3월16일 부산 롯데호텔 소연회실. 민국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윤환최고위원은 “경북에서는 칠곡서 대통령을 내자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며 이고문을 대권후보로 옹립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장기표최고위원도 ‘총선 바람몰이’를 위한 대권후보 조기 가시화를 주장했다. 이에 조대표는 자신의 ‘비례대표 포기 카드’로 배수진을 쳤다. 이고문의 부상을 막으면서 “비례대표 한 번으로 대권경쟁에 무임승차하려 한다”는 당 안팎의 비난여론을 차단하려는 노림수였다.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두 사람이 벌이는 치열한 ‘샅바싸움’은 창당 과정에서도 있었다. 당초 이고문은 조대표와 함께 공동대표최고위원 자리를 희망했으나 조대표측의 반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양측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계속되자 김윤환 신상우최고위원 등이 나서 ‘최고위원보다 한 단계 격이 높은’ 상임고문으로 이고문의 마음을 달랬다는 후문이다.

    조순과 이수성 두 사람은 현재 제4당인 민국당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동지다. 하지만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대권의 꿈을 가진 경쟁자다.



    이들은 이제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다. 서울대 교수로 일했던 두 사람의 연은 꽤 오랜 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걸어온 길이 비슷하면서도 극히 대조적인 인물이다.

    나이로는 조순대표(28년생)가 이수성고문(37년생)보다 아홉살 위다. 고교와 대학은 서로 경쟁적인 곳을 나왔다. 조대표는 경기고와 서울대 상학과 출신이고 이고문은 서울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두 사람이 서울대에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7년)였다. 미국 생활(뉴햄프셔대 조교수)로 좀 늦은 편인 조대표는 서울대 상대 부교수로, 이고문은 서울대 법학연구소 전임강사로 출발했다. 두 사람의 교수생활은 매우 대조적이었다는 게 주위사람들의 얘기다. 먼저 조대표는 ‘조순학파’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정통 경제학을 공부한 제1세대로 경제학도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이었다. 그는 변형윤교수와 더불어 한국 경제학계의 양대 학맥을 길러냈다. 74년에 펴낸 ‘경제학원론’은 ‘한국경제학의 바이블’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절 조대표에겐 정치적 면모가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의 제자인 모교수는 “권력의지가 있었는데 우리가 눈치를 못챘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88년 경제부총리로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많은 제자들이 너무나 놀랐다”고 말했다.

    반면 이고문은 어릴 적부터 정치성향이 강했다. 그는 이렇게 옛날을 회고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시절 내 꿈은 정치에 있었다. 대학지원도 정치과로 했는데 부친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모친과 담임선생님의 합의로 나도 모르게 법대로 바뀌어 버렸다.”

    대학교수 시절 그는 ‘학문보다는 사람을 챙기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계와 관계에 인간관계가 매우 두터웠다. “이수성씨가 아는 모든 사람은 형님 아니면 아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자신도 “법조문보다는 법정신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밤을 새우는 연구가 적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학문적으로 성취한 것이 별로 없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매년 한 두 편의 논문은 꼬박 발표했다.

    조대표와 이고문 두 사람은 교수시절 안면은 있었다지만 극히 대조적인 스타일 탓인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측근들은 “두 분이 서로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에게 88년은 ‘용틀임의 첫 해’였다. 조대표는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전격적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한국경제의 총수(부총리)가 된 것. 이고문은 서울대 법대 첫 직선학장의 영예를 안았다. 학자에서 행정가로 활동영역을 넓히기 시작한 것.

    두 사람이 처음으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91년 서울대 첫 직선 총장선거에서였다.

    당시 상당수의 젊은 교수들이 막 부총리직에서 물러난 조대표를 총장후보로 밀었다. 조대표는 후보추천 위에서도 많은 표를 얻어 유력한 예비후보가 됐다. 하지만 조대표는 65세 정년이 불과 2년 정도 남은 상태인데다 직선에 나서길 꺼려 중도 포기했다.

    당시 이고문은 조대표에 비해 많은 표는 아니었지만 예비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은사, 선배들과 함께 경쟁할 수는 없다”며 사퇴했다. 주위에서는 이를 두고 “다음 기회를 노린 매우 깔끔한 행보” 라고 평가했다.

    95년 들어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정치적 거물’로 성장한다. DJ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한 조대표는 ‘대통령 다음가는 자리’라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다. 이고문은 95년 3월 서울대 두 번째 직선총장이 된 뒤 9개월만인 그해 12월 YS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시장과 총리로 학교 밖에서 다시 조우하게 됐지만 썩 밀월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일화도 있다. 97년 1월 어느 날 국무회의 석상에서 두 사람이 언쟁을 벌였다.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기구와 정원기준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올린 때문이었다. 당시 조시장은 “지자체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지자체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라고 반발했고 이총리는 “자치단체가 독립공화국이 아닌 이상 중앙정부가 방관만 할 수는 없다”고 맞섰다.

    대통령선거의 해인 97년 상반기 두 사람은 대권 행보를 염두에 두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수성 신한국당고문은 그해 5월 조순시장의 출마설이 나오자 이렇게 ‘라이벌의식’의 일단을 드러냈다. “조순서울시장이 야당 공천을 받지 못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나올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훌륭한 맞수가 될 것이다.”

    이 무렵 두 사람은 여러 정치세력들의 저울질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김원기씨가 이끄는 국민통합추진회의는 “신한국당 이수성고문을 밀자”는 쪽과 “조순시장을 제3의 야당후보로 옹립하자”는 쪽으로 갈리기도 했다.

    DJ와 손을 잡았다가 결별한 것도 두 사람의 정치역정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조대표는 95년 DJ가 후견한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이 됐지만 DJ가 국민회의 분당을 추진하자 ‘유신 쿠데타’라 비난하며 갈라섰다. 이고문은 DJ정부 출범직후인 98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DJ의 품’에 안겼지만 지난해 민주당 창당과정에서 ‘정치적 계산’이 맞지 않아 결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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