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의 태풍?’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현대그룹 대권 싸움은 정몽헌(MH) 회장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남으로써 정몽구(MK) 회장쪽의 ‘반격’은 그야말로 ‘미풍’ 정도에 그친 셈이 됐다. MK는 괜히 쓸데없이 욕심을 냈다가 그룹 회장 직함마저 잃게 됐다. 스타일을 완전히 구긴 MK는 자신이 맡은 자동차 소그룹의 계열 분리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형제간 대권 싸움에서 MH의 최종 승리가 확인된 것은 3월27일 오전 7시30분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사장단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현대경영자협의회. ‘왕회장’ 정주영명예회장은 이 자리에서 3월24일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이 발표한 ‘MH의 현대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했다. 이에 따라 3월14일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하고 노정익 현대캐피털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으로 전보했던 문제의 인사도 백지화됐다.
왕회장 MK 경영능력 높이 사 낙점
왕회장은 이날 MK에 대해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등 여러 가지 일이 바쁘니 자동차에 전념하라”면서 “앞으로 몽헌 회장을 도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왕회장은 또 “앞으로 중요한 일은 나와 상의해서 처리할 예정이기 때문에 (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회장을 맡아도 여러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MK는 “5년 동안 큰 대과 없이 그룹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만족한다. 앞으로 정몽헌회장과 각 사가 협조해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왕회장의 결정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MH는 이날 오전 10시로 예정했던 기자회견을 연기하고 그룹 운영 구상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인사로 촉발된 MK와 MH간 갈등은 일단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한때 형제간 갈등은 MK측의 ‘저항’으로 엎치락뒤치락 혼미를 거듭했다. MK측은 3월24일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이익치회장을 현대증권 회장에 유임하고 MH를 현대그룹 단독 회장으로 한다고 발표하자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틀 후인 3월26일 MK측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주영명예회장의 사인이 들어간 문서를 근거로 MK가 그룹 공동회장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즉각 MH측이 사실을 부인하고 MK측이 다시 반박하는 등 형제간 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회장 권위 앞에서는 MK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 경영권은 MH가 승계하는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왕회장은 그동안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온 MK에게는 자신의 42년 체취가 밴 서울 청운동 자택을 물려줌으로써 집안의 법통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집안 일과 비즈니스를 분명히 나눠 경영 능력이 검증된 MH에게 비즈니스를 맡긴 셈이다.
MK와 MH의 그동안 대권 싸움에서 특이한 점은 형인 MK가 ‘공격’하고 MH는 ‘수비’에 치중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번 대권 싸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장남 승계의 유교적 전통과 달리 왕회장이 5남에게 실질적인 후계자 수업을 시키면서 MK가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형제간 대권 분쟁이 심심찮게 벌어진 것은 현대의 독특한 후계구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왕회장은 몽(夢)자 형제들에게 관할 계열사를 나눠주고 각각 계열사 경영권을 인정해 주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 경영능력을 보인 아들들에게는 경영권에 맞먹는 지분을 넘겨줌으로써 재산 분배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왕회장은 현재 모기업인 건설과 지주회사격인 중공업의 대주주로 남아 있다. 왕회장의 이 지분은 특히 MK와 MH의 분가 구도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 규모였고, 그룹 경영 대권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를 상속받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두 형제간 대권 싸움이 계속돼 왔던 것. 그러나 왕회장의 결정으로 MK측의 반격은 더 이상 힘들게 됐다.
현대 관계자들은 왕회장의 MH에 대한 두터운 신임에 비춰볼 때 최근의 MK쪽 공격은 애초부터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MK쪽은 MH가 해외출장중이던 3월14일 밤 9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에, 노정익 현대캐피털 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에 내정했다고 발표, MH쪽에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고 판단했겠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오산이었다는 것.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은 그 근거로 이미 작년 6월 현대증권 유상증자시 MH쪽으로 지분 정리를 마친 사실을 든다. 당시 MH 계열인 현대상선은 증권 유상증자에 참여, 지분율을 16.59%에서 16.65%로 높인 반면 현대중공업은 오히려 지분율이 낮아졌다. 증권을 MH쪽으로 정리중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MK측은 이익치회장이 대북사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회장은 왕회장의 마지막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대북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어 왕회장이나 MH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 이회장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 98년 현대의 대북사업 재개 직후 북한측 채널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익치 회장이 3월17일 갑자기 중국 상하이로 출국한 것도 대북사업 관련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물론 왕회장의 직접 지시를 받고 출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회장이 3월24일 현대증권으로 출근해 “인사는 대주주가 결정해 구조조정본부장이 통보하도록 돼있는데 아직 인사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당당히’ 말한 것은 적어도 증권 대주주인 MH와는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MK와 MH 사이의 마지막 후계 경쟁 무대였다는 게 현대 관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 경쟁에서 MH는 이익치회장과 김윤규 현대아산사장 등의 도움을 받아 MK를 제치고 주도권을 잡았다. MH 후계구도가 ‘확실히’ 굳어지는 계기였다.
사실 왕회장은 대북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MK와 MH 두 형제에 대한 경영능력 평가를 끝낸 상태였다 는 게 현대측의 이야기다. 왕회장의 이런 평가는 96년초 두 형제에 대한 인사에서 드러났다. 당시 왕회장은 MK를 그룹 회장에, MH를 그룹 부회장에 발령냄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두 형제간 서열을 정해주었다.
그러나 이 인사를 자세히 보면 그룹회장 자리는 그동안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온 MK에 대한 단순한 ‘배려’였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MH를 후계자로 낙점하고 그에게 후계 수업을 시키고 있음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왕회장은 당시 두 형제에 대한 인사를 앞두고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회장이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한 인사에게 “경영능력 등 모든 면에서 몽헌이가 앞서는데…”라고 운을 뗐으나 이 인사가 “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만류, ‘MK-회장, MH-부회장’으로 낙착됐다는 것.
그러나 MK의 그룹내 위상은 그룹회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MK와 MH 두 형제가 관할하는 계열사를 보면 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MK는 74년 현대차써비스를 처음 맡은 이래 현대정공 강관 산업개발 인천제철 등을 잇따라 자신의 몫으로 챙겼지만 MH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빛이 안나는’ 사업군이었다.
반면 84년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면서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던 MH는 전자 상선 등을 맡았다. MH는 특히 96년 그룹 부회장 취임과 함께 그룹의 모기업인 건설을 맡음으로써 실질적인 법통은 MH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97년에는 형이 관장하던 종합상사까지 자신의 휘하로 끌어옴으로써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을 지배하게 됐다.
MH가 전면에 부각된 것은 98년 1월13일 형인 MK와 함께 그룹공동회장으로 발령나면서부터. 당시 현대의 인사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룹회장 쌍두체제’는 국내 재벌그룹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왕회장이 자신의 의중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인사라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MH는 96년 이후 왕회장 측근들을 핵심 참모로 끌어모았다. 언제든 왕회장과 독대가 가능한 이익치회장, 김윤규 현대건설사장,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번 형제간 갈등에서도 MH에게 큰 힘이 됐다. 반면 MK는 왕회장과 독대할 수 있는 측근이 없어 ‘참모전쟁’에서도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밀리는 듯하던 MK측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MK는 98년말 기아자동차 인수를 계기로 그동안 현대자동차를 키워온 삼촌 정세영명예회장을 밀어내고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회장에 취임, 재산분할 구도에서 동생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이어 작년 3월에는 정세영명예회장에게 현대산업개발을 넘기는 대신 현대자동차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함으로써 자동차 소그룹을 장악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융부문까지 욕심을 냈다가 동생에게 KO패를 당하게 된 것.
현대는 작년 4월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올해 안에 자동차를 분리하고 2003년까지 5개 전문 소그룹으로 분리, 사실상 그룹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MK의 현대 회장직 면직을 계기로 현대그룹은 △MH가 이끄는 현대그룹 본류(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MK의 자동차그룹 △정몽준의원의 중공업그룹 등 3개 그룹으로의 분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 안팎에서는 그룹 분할 못지 않게 선진적인 지배구조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와중에 일반 주주들과 이사회가 철저히 소외되고 전문경영인들이 오너 형제간 싸움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현실은 재벌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관행에 젖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 안타까운 점은 왕회장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현대에서 이런 관행이 사라지기는 힘들다는 사실일 것이다.
형제간 대권 싸움에서 MH의 최종 승리가 확인된 것은 3월27일 오전 7시30분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사장단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현대경영자협의회. ‘왕회장’ 정주영명예회장은 이 자리에서 3월24일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이 발표한 ‘MH의 현대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했다. 이에 따라 3월14일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하고 노정익 현대캐피털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으로 전보했던 문제의 인사도 백지화됐다.
왕회장 MK 경영능력 높이 사 낙점
왕회장은 이날 MK에 대해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등 여러 가지 일이 바쁘니 자동차에 전념하라”면서 “앞으로 몽헌 회장을 도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왕회장은 또 “앞으로 중요한 일은 나와 상의해서 처리할 예정이기 때문에 (몽헌 회장이) 단독으로 회장을 맡아도 여러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MK는 “5년 동안 큰 대과 없이 그룹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만족한다. 앞으로 정몽헌회장과 각 사가 협조해 좋은 성과를 거두기 바란다”고 왕회장의 결정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MH는 이날 오전 10시로 예정했던 기자회견을 연기하고 그룹 운영 구상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이익치 현대증권회장 인사로 촉발된 MK와 MH간 갈등은 일단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한때 형제간 갈등은 MK측의 ‘저항’으로 엎치락뒤치락 혼미를 거듭했다. MK측은 3월24일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이익치회장을 현대증권 회장에 유임하고 MH를 현대그룹 단독 회장으로 한다고 발표하자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틀 후인 3월26일 MK측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주영명예회장의 사인이 들어간 문서를 근거로 MK가 그룹 공동회장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즉각 MH측이 사실을 부인하고 MK측이 다시 반박하는 등 형제간 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회장 권위 앞에서는 MK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 경영권은 MH가 승계하는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왕회장은 그동안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온 MK에게는 자신의 42년 체취가 밴 서울 청운동 자택을 물려줌으로써 집안의 법통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집안 일과 비즈니스를 분명히 나눠 경영 능력이 검증된 MH에게 비즈니스를 맡긴 셈이다.
MK와 MH의 그동안 대권 싸움에서 특이한 점은 형인 MK가 ‘공격’하고 MH는 ‘수비’에 치중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이번 대권 싸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장남 승계의 유교적 전통과 달리 왕회장이 5남에게 실질적인 후계자 수업을 시키면서 MK가 ‘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형제간 대권 분쟁이 심심찮게 벌어진 것은 현대의 독특한 후계구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왕회장은 몽(夢)자 형제들에게 관할 계열사를 나눠주고 각각 계열사 경영권을 인정해 주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 경영능력을 보인 아들들에게는 경영권에 맞먹는 지분을 넘겨줌으로써 재산 분배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왕회장은 현재 모기업인 건설과 지주회사격인 중공업의 대주주로 남아 있다. 왕회장의 이 지분은 특히 MK와 MH의 분가 구도의 열쇠로 작용할 수 있는 규모였고, 그룹 경영 대권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를 상속받는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두 형제간 대권 싸움이 계속돼 왔던 것. 그러나 왕회장의 결정으로 MK측의 반격은 더 이상 힘들게 됐다.
현대 관계자들은 왕회장의 MH에 대한 두터운 신임에 비춰볼 때 최근의 MK쪽 공격은 애초부터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MK쪽은 MH가 해외출장중이던 3월14일 밤 9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에, 노정익 현대캐피털 부사장을 현대증권 사장에 내정했다고 발표, MH쪽에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고 판단했겠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오산이었다는 것.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은 그 근거로 이미 작년 6월 현대증권 유상증자시 MH쪽으로 지분 정리를 마친 사실을 든다. 당시 MH 계열인 현대상선은 증권 유상증자에 참여, 지분율을 16.59%에서 16.65%로 높인 반면 현대중공업은 오히려 지분율이 낮아졌다. 증권을 MH쪽으로 정리중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MK측은 이익치회장이 대북사업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회장은 왕회장의 마지막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대북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어 왕회장이나 MH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 이회장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 98년 현대의 대북사업 재개 직후 북한측 채널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익치 회장이 3월17일 갑자기 중국 상하이로 출국한 것도 대북사업 관련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물론 왕회장의 직접 지시를 받고 출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회장이 3월24일 현대증권으로 출근해 “인사는 대주주가 결정해 구조조정본부장이 통보하도록 돼있는데 아직 인사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당당히’ 말한 것은 적어도 증권 대주주인 MH와는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현대의 대북사업은 MK와 MH 사이의 마지막 후계 경쟁 무대였다는 게 현대 관계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 경쟁에서 MH는 이익치회장과 김윤규 현대아산사장 등의 도움을 받아 MK를 제치고 주도권을 잡았다. MH 후계구도가 ‘확실히’ 굳어지는 계기였다.
사실 왕회장은 대북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MK와 MH 두 형제에 대한 경영능력 평가를 끝낸 상태였다 는 게 현대측의 이야기다. 왕회장의 이런 평가는 96년초 두 형제에 대한 인사에서 드러났다. 당시 왕회장은 MK를 그룹 회장에, MH를 그룹 부회장에 발령냄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두 형제간 서열을 정해주었다.
그러나 이 인사를 자세히 보면 그룹회장 자리는 그동안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온 MK에 대한 단순한 ‘배려’였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MH를 후계자로 낙점하고 그에게 후계 수업을 시키고 있음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왕회장은 당시 두 형제에 대한 인사를 앞두고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회장이 자신의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한 인사에게 “경영능력 등 모든 면에서 몽헌이가 앞서는데…”라고 운을 뗐으나 이 인사가 “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만류, ‘MK-회장, MH-부회장’으로 낙착됐다는 것.
그러나 MK의 그룹내 위상은 그룹회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MK와 MH 두 형제가 관할하는 계열사를 보면 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MK는 74년 현대차써비스를 처음 맡은 이래 현대정공 강관 산업개발 인천제철 등을 잇따라 자신의 몫으로 챙겼지만 MH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빛이 안나는’ 사업군이었다.
반면 84년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산업에 뛰어들면서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던 MH는 전자 상선 등을 맡았다. MH는 특히 96년 그룹 부회장 취임과 함께 그룹의 모기업인 건설을 맡음으로써 실질적인 법통은 MH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97년에는 형이 관장하던 종합상사까지 자신의 휘하로 끌어옴으로써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을 지배하게 됐다.
MH가 전면에 부각된 것은 98년 1월13일 형인 MK와 함께 그룹공동회장으로 발령나면서부터. 당시 현대의 인사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룹회장 쌍두체제’는 국내 재벌그룹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왕회장이 자신의 의중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인사라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MH는 96년 이후 왕회장 측근들을 핵심 참모로 끌어모았다. 언제든 왕회장과 독대가 가능한 이익치회장, 김윤규 현대건설사장,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번 형제간 갈등에서도 MH에게 큰 힘이 됐다. 반면 MK는 왕회장과 독대할 수 있는 측근이 없어 ‘참모전쟁’에서도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밀리는 듯하던 MK측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MK는 98년말 기아자동차 인수를 계기로 그동안 현대자동차를 키워온 삼촌 정세영명예회장을 밀어내고 현대자동차 및 기아자동차 회장에 취임, 재산분할 구도에서 동생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이어 작년 3월에는 정세영명예회장에게 현대산업개발을 넘기는 대신 현대자동차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함으로써 자동차 소그룹을 장악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융부문까지 욕심을 냈다가 동생에게 KO패를 당하게 된 것.
현대는 작년 4월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올해 안에 자동차를 분리하고 2003년까지 5개 전문 소그룹으로 분리, 사실상 그룹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MK의 현대 회장직 면직을 계기로 현대그룹은 △MH가 이끄는 현대그룹 본류(전자-건설-금융 및 서비스) △MK의 자동차그룹 △정몽준의원의 중공업그룹 등 3개 그룹으로의 분화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 안팎에서는 그룹 분할 못지 않게 선진적인 지배구조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영권 분쟁의 와중에 일반 주주들과 이사회가 철저히 소외되고 전문경영인들이 오너 형제간 싸움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현실은 재벌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관행에 젖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 안타까운 점은 왕회장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현대에서 이런 관행이 사라지기는 힘들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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