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홍세화씨. 79년의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그는 분단체제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홍씨가 지난해 6월 귀국, 20년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나라’ 한국을 찾은 홍세화씨는 참으로 오랜만에 이데올로기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인’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김대중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즈음해 그 사연이 알려진 제2의 ‘파리의 택시운전사’ 이유진씨(61)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파리의 교포신문 ‘오니바(oniva)’ 등에 내 이야기가 실리고 대통령 방불 일정이 잡히자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했는지 25년만에 처음으로 대사관 관계자가 연락을 했습디다. 내 죄의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소명’ 절차를 거치면 한국에 들어가도 좋다고요. 하지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반성문을 쓰고 소명해야 합니까.”
그의 죄는 ‘간첩죄와 아동 인질죄’다. 1979년 한국 검찰이 그를 간첩으로 기소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왜 ‘간첩’이 된 것일까.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63년 도불, 파리 5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79년 5월 이씨는 대학 후배이자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부관장이었던 한영길씨로부터 “프랑스에 정치망명을 하고자 하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한씨의 부인이 가출했다가 센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발단이 돼 정보당국과 한씨가 심한 마찰을 빚었고 이에 겁먹은 한씨가 망명을 결심한 것이다. 만류하던 이씨는 결국 한씨와 딸이 임시망명증을 받도록 주선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한국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던 한씨는 기관원에 의해 한국으로 압송되고 이유진씨는 한국 언론에 ‘북괴 공작원’으로 알려진다. 이씨가 한씨와 그의 딸을 납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가 생각하는 죄목은 따로 있다. 이씨는 당시 박정희정권의 ‘동백림 사건’ 조작에 실망해 75년 프랑스 국적을 얻은 이후 정성배 전 프랑스사회과학대학원교수 등과 함께 프랑스에서 박정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씨는 독재와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잡지 ‘동포’와 ‘자유평론’ 등을 펴냈으며 기소된 뒤인 80년 9월에는 유럽의 지식인들과 함께 파리 모베르 뮈튀알리테 회관에서 ‘군사재판 앞에 선 김대중’이라는 집회를 주도해 김대중 구명운동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그는 이같은 반정부 활동이 20년간 자신을 옭죈 ‘간첩죄’의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간첩’으로 낙인찍힌 뒤 1981년 북한에 다녀왔다. 고향인 평양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 갈 곳은 못되더라”고 말했다.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머물 공간을 찾지 못한 것이다.
“몇 년 전 내 억울함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인 한영길씨의 소식을 정보관계자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씨는 한국에서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현재 부인과 안과 의사로서 파리대 교수와 결혼한 장녀, 그리고 19세 된 아들과 함께 파리에 체류 하고 있다.
“늦게 본 아들이 염색체 이상으로 말을 못합니다. 내가 없으면 머리털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예민한데 내가 한국에 가서 여기 저기 끌려다니면 아이가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소명이란 항복 아닙니까. 그걸 수용하는 것 자체가 간첩죄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거부하는 겁니다.”
한국에는 팔순 넘은 노모가 홀로 산다.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싶어 그는 며칠 전 주불 한국대사에게 ‘소명절차의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책임있는 대답’을 들으면 모친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난 그래도 편하게 지냈죠. 한국에서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김대중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즈음해 그 사연이 알려진 제2의 ‘파리의 택시운전사’ 이유진씨(61)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파리의 교포신문 ‘오니바(oniva)’ 등에 내 이야기가 실리고 대통령 방불 일정이 잡히자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했는지 25년만에 처음으로 대사관 관계자가 연락을 했습디다. 내 죄의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소명’ 절차를 거치면 한국에 들어가도 좋다고요. 하지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반성문을 쓰고 소명해야 합니까.”
그의 죄는 ‘간첩죄와 아동 인질죄’다. 1979년 한국 검찰이 그를 간첩으로 기소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왜 ‘간첩’이 된 것일까.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63년 도불, 파리 5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문화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79년 5월 이씨는 대학 후배이자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부관장이었던 한영길씨로부터 “프랑스에 정치망명을 하고자 하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한씨의 부인이 가출했다가 센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발단이 돼 정보당국과 한씨가 심한 마찰을 빚었고 이에 겁먹은 한씨가 망명을 결심한 것이다. 만류하던 이씨는 결국 한씨와 딸이 임시망명증을 받도록 주선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한국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던 한씨는 기관원에 의해 한국으로 압송되고 이유진씨는 한국 언론에 ‘북괴 공작원’으로 알려진다. 이씨가 한씨와 그의 딸을 납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가 생각하는 죄목은 따로 있다. 이씨는 당시 박정희정권의 ‘동백림 사건’ 조작에 실망해 75년 프랑스 국적을 얻은 이후 정성배 전 프랑스사회과학대학원교수 등과 함께 프랑스에서 박정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이씨는 독재와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잡지 ‘동포’와 ‘자유평론’ 등을 펴냈으며 기소된 뒤인 80년 9월에는 유럽의 지식인들과 함께 파리 모베르 뮈튀알리테 회관에서 ‘군사재판 앞에 선 김대중’이라는 집회를 주도해 김대중 구명운동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그는 이같은 반정부 활동이 20년간 자신을 옭죈 ‘간첩죄’의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간첩’으로 낙인찍힌 뒤 1981년 북한에 다녀왔다. 고향인 평양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두 번 갈 곳은 못되더라”고 말했다.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머물 공간을 찾지 못한 것이다.
“몇 년 전 내 억울함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인 한영길씨의 소식을 정보관계자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씨는 한국에서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현재 부인과 안과 의사로서 파리대 교수와 결혼한 장녀, 그리고 19세 된 아들과 함께 파리에 체류 하고 있다.
“늦게 본 아들이 염색체 이상으로 말을 못합니다. 내가 없으면 머리털이 한 움큼씩 빠질 정도로 예민한데 내가 한국에 가서 여기 저기 끌려다니면 아이가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소명이란 항복 아닙니까. 그걸 수용하는 것 자체가 간첩죄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거부하는 겁니다.”
한국에는 팔순 넘은 노모가 홀로 산다.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싶어 그는 며칠 전 주불 한국대사에게 ‘소명절차의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책임있는 대답’을 들으면 모친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난 그래도 편하게 지냈죠. 한국에서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